▲산책로로 조성된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 동백숲. 4·3때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작은 한라산' 같은 이곳에 찾아들었다. /사진=김명선기자
집나서면 황천길… 살 수만 있다면 아무데나'곱을락'했던 선흘리 동굴 철문으로 굳게 잠겨"소리없이 스러진 동지 역사의 꽃으로 피어날 것"
1948년 4월 3일. 오름위에 보름달이 둥두렷이 떠오른 이날, 대낮같은 붉은 기운이 퍼진다. 오름에 봉화가 오르면서 무장봉기가 시작된 것이다. 토벌대는 빨치산과 주민을 분리시키고 게릴라의 근거지를 없앨 생각으로 중산간 주민들을 해안으로 소개시킨다. 모두 태우고, 모두 죽이고, 모두 빼앗는 삼광(三光)작전이 뒤따른다.
"군인들이 긴 대빗자루 끝에 불을 붙여들고 집집마다 돌면서 처마에 불을 놓았어요. 어디 집 뿐이에요? 헛간, 노적가리 심지어는 들에 베어다 쌓아둔 메밀까지 깡그리 태웠다구요. 하이구, 그 뜨거운 불덩이며 연기로 동네가 왠통 생지옥이랍니다. 휴우, 여기 오니까 겨우 살 것 같네요. "('붉은 섬')
그가 누구든, 피하지 않으면 죽는 세상이었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 어디든 갔다. '빌레못 동굴이나 민오름, 노루오름, 검은 오름 아무데나….' 선흘리 사람들은 동백숲으로 갔다. '작은 한라산' 같은 이 마을의 곶은 은신처를 제공했다.
'난리통'에 스물셋이었던 고성준씨(84·선흘리). 지난해 4·3을 온 몸으로 통과한 남편을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고 쓸쓸히 여생을 보내고 있다. "살아나젠 허난 운좋게도 잡히질 않았다"는 그는 결혼하고 3년 뒤 선흘리에서 사건을 맞았다.
"그때는 곱을락('숨바꼭질'의 제주어)했주. 선흘곶으로 숨으러 다녔으니까. 산사람들 때문에도 고생해서. 아침에 일어나보민 마당에 삐라가 이신거라. 순경 무서워서 그걸 불태우기에 바빴주."
차라리 그것이 숨바꼭질이었다면…. 해가 기울면 아무일 없었다는 듯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을텐데. 고씨는 선흘리 곳곳에 있는 크고 작은 동굴에서 몸을 숨겼던 기억을 꺼냈다. 목시물굴이 피난처였다. 아기를 데리고 피신온 여자가 있었다. 굴 밖으로 아기 울음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기 위해 입을 틀어막는 바람에 여자는 그만 제 자식을 잃었다. 은신처가 발각돼 황급히 굴 속을 빠져나오면서 그 아일 망태기에 담아 나뭇가지에 걸어두고 왔단다.
"아침에 본 사람은 저녁에 못보고 저녁에 본 사람을 아침에 보지 못하는 게 다반사가 됐어. 우리도 지금은 살아있긴 하다만 언제 어떻게 될 지 몰라. 그렇지만 살아있는 한은 굳세게 살자. 자, 에미야, 힘을 내자꾸나."('붉은 섬')
선흘리 사람들이 몸을 웅크려 밥을 먹고 잠을 잤던 동굴들은 지금 철문으로 굳게 닫혀있다. 허옇게 솟아나오는 뜨거운 연기가 동굴이 살아있음을 말해준다.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그 날을 기억하고 있어서일까. 제주시장은 선흘리 목수물굴(목시물굴)에, 북제주군수는 대섭이굴에 각각 안내판을 세웠다. 반못굴(도톨굴)입구엔 4·3 단체에서 만들어놓은 유적지 안내판이 보였다.
'붉은 섬'은 무장대로 인해 고통받는 민중의 삶보다 군경에 의해 고초를 겪는 대목이 여럿 등장한다. "우리가 뭘 잘못했기에 마른 나무에 물짜듯 맨날 들들 볶는 거야", "대흘리 사람들은 원족가듯 떼지어서 쓰리 쿼터를 타고 부대로 실려갔는데 엉뚱하게도 차가 곧장 읍내 정뜨르 비행장으로 가더니 따라락 총질한 후에 휘발유를 뿌려서 태워버렸대"와 같은 주민의 대사는 토벌대에 대한 원망을 드러낸다.
▲목시물굴에서 허연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선흘리 주민들의 피신처가 되었던 동굴중 하나로 이곳에서 희생자가 여럿 나왔다.
하지만 무장대에게도 끝이 보인다. 1949년 6월 7일. 무장대 사령관 종덕은 저항의 불길이 잠시 꺼지더라도 후세의 누군가에 의해 다시 점화될 거라 믿지만, 홍란은 무력항쟁의 결과가 이토록 허망하게 막을 내릴줄 몰랐다며 허탈해한다.
"당이 우릴 기만했어요. 우두머리들은 살 구멍을 찾아 몽땅 도망쳐버리고 애꿎은 송사리와 피라미들만 피를 흘리는군요. 이게 혁명의 신성성인가요?"('붉은 섬')
홍란은 종덕에게 묻는다. 애초부터 미국이라는 강대국이 버티고 있는 전쟁임에도 무장봉기를 일으킨 건 지도부의 판단착오였다고 몰아붙인다. 그럼에도 작가는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 좌익의 무장대열에 발을 들여놓았던 소수의 민족주의자들과 이를 옹호한 민중들에게 지지를 보낸다. 종덕의 시체는 인민군 복장에 숟가락을 꽂은 채 관덕정 마당에 전시된다. 실존 인물 이덕구를 연상시킨다. 작가는 결말에서 종덕을 예수의 형상대로 처형당하는 민중의 영웅으로 그린다. 토벌대 연대장이 종덕과 그의 아들 민수의 시신을 두고 폭도가 천진한 소년을 무참히 살해한 것으로 둔갑시켜버리지만, 언젠가 사실이 밝혀지리라.
"산에는 늘상 꽃이 피기만 하는게 아니잖니? 꽃이 지기도 하지. 한라산 어느 계곡에 죽어 뼈다귀조차 추스르지 못한 동지들은 꽃이 지는 것처럼 소리없이 스러져갔지만 먼 훗날 그들은 역사의 꽃으로 다시 피어날거야. 두고 보렴"('붉은 섬')
/진선희기자 jin@hallailbo.co.kr
공연 기대 접었던 '붉은 섬'…제주 대표로 전국연극제에
'붉은 섬'을 원작대로 공연하려면 2시간 30분여의 시간과 40명이 넘는 배우가 필요하다. 이때문에 작가는 1991년 이 작품을 발표만 해놓고 공연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하지만 곧 '붉은 섬'을 무대에 올리겠다는 연출자가 나섰다. 김중효씨였다. 1992년 제주에서 전국연극제가 열렸는데 도내 극단이 한데 참여한 제주극협의 이름으로 '붉은 섬'이 제주 대표작으로 공연됐다.
우여곡절이 많았다. '붉은 섬'의 내용을 수정하지 않으면 공연을 할 수 없다는 외부의 압력을 받았다. 작가는 고칠 게 없다며 그냥 가자고 했다. '붉은 섬'은 예정대로 그 해 제주도문예회관 대극장 무대에 올랐지만 어딘가 찜찜했다. 대회 개최지는 상위 입상하던 '관행'을 깨고 주최측은 마지못해 이 작품에 장려상을 안겨줬다.
'붉은 섬'은 기성 극단만이 아니라 1990년대 대학가에서 선호하는 작품이었다. 작가가 기억하기론 부산, 대구, 전주 등 각지의 대학에서 '붉은 섬'을 무대로 옮겼다.
'기억 투쟁과 문화운동의 전개'(2004·역사비평사)에서는 4·3 무대극의 시작을 '붉은 섬'으로 꼽고 있다. 1992년 6월에는 서울에서 장일홍의 또다른 4·3희곡 '당신의 눈물을 보여주세요'가 공연됐고, 강용준의 '폭풍의 바다'는 1994년 서울과 제주에서 잇따라 무대에 올려졌다. 제주 출신만이 아니라 하상길의 '느영나영 풀멍 살게'가 1995년에, 오태석의 '앞산아 당겨라 오금아 밀어라'가 2002~2003년 제주 안팎에서 공연돼 4·3에 대한 다양한 계층의 관심을 이끌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