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간 이들의
명복을 빕니다"
동부토벌 중심 … 숱한 집단학살의 기억
49. 함덕 서우봉과 군 주둔지
홍난선(80·사진) 할머니는 4·3 당시 대흘에서 신촌으로 소개를 내려오다 두 가족 아홉명의 사람들이 군인들에게 붙잡혀 함덕대대본부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그는 질기고 넓적한 고무줄로 온 몸이 거멓게 되도록 매를 맞기도 했다. 옷을 모두 벗으라 입으라하며 군인들에게 희롱을 당하는 등 함덕수용소의 기억에 몸서리를 쳤다.
"48년 음력 11월 25일 오전입니다. 그날은 비가왔어요. 3구 수용소에 군인들이 몰려왔습니다. 오전인데 술을 먹어서 얼굴들이 벌겋게 되어 있었는데, 사람들을 선별하였습니다. 그리고 한낮이 되어서야 살아남을 11명을 구분하고 나머지 젊은 여자들과 노인들을 대대본부로 끌고 갔습니다. 3구 수용소는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서 창문으로 대대본부를 볼 수 있었는데, 오후 4시경에 끌려간 사람들이 하얗게 서우봉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열아홉살의 시누이와 스물두살의 동네 친구도 포함되어 있었지요. 저녁 무렵 총살을 하였는데 스물여섯명 중에서 시신을 찾은 사람은 열두명 뿐이었습니다. 열 네사람의 시신은 벼랑에서 바다로 던져버렸는데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시어머니가 시누이 시신을 찾으려고 노력을 해도 허사였습니다. 제 친구는 벼랑 밑으로 떨어졌는데 바위 위에 걸쳐져서 시신이나마 수습할 수 있었습니다." 라고 당시의 상황을 증언했다.제주 최고의 해수욕장으로 유명한 조천읍 함덕리는 1구부터 4구까지 이어져 웬만한 면(面)지역을 능가하는 전국 최대의 리(里) 단위 마을이다.
함덕리는 일제시대 까지만 해도 '멸치 후리는 노래'가 울려퍼지는 도내 제일의 멸치 어장이었다. 최근 이 마을은 해수욕장 개발과 함께 각종 호텔과 위락시설이 들어서 급속도로 관광지의 면모를 갖춰 가면서 마을의 옛 모습은 아스라이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4·3 당시 함덕리는 육군제9연대 일부 대대가 주둔하기 시작하면서 토벌과 학살, 주민수용 등 토벌 진압의 중심마을로 기능하면서, 마을주민과 중산간 마을 사람들에게 한과 공포의 기억으로 지금도 남아있다. 함덕리 주민들은 군 주둔 이후, 토벌작전에 동원되랴, 피난 온 웃드르 주민들의 거처를 마련하랴, 그리고 함덕리 곳곳에서 희생되어 나가는 처참한 모습들을 일상적으로 접하느라고 여느 지역 못지 않게 아픈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학교에 군부대 주둔
1948년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사령관 중령 송요찬)로 재편되면서 제9연대 2대대(대대장 대위 김창봉)가 성산포 지역과 나뉘어 함덕국민학교에 주둔하게 된다. 이로써 함덕리는 명실상부한 북제주군 동부지역의 토벌 근거지가 되었다.
이런 이유로 함덕리민들은 군부대에서 즉결 처형되는 희생자를 많이 볼 수 밖에 없었다. 함덕해수욕장 인근의 모래밭이 대부분 학살터일 정도로 일상적인 총살과 구금, 취조가 행해졌다.
함덕 대대본부는 당시 조천면, 구좌면 등지의 주민들에겐 잊을 수 없는 악몽으로 남아있다. 토벌대에 붙잡힌 주민들이나 조금만 혐의가 있는 사람들은 모두 함덕 주둔 대대본부를 거쳐야 했다. 거기에 한 번 불려간 주민들은 대부분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조천, 함덕은 물론 선흘, 대흘, 와흘 등 조천면 중산간 마을과 구좌면 주민 등 인근 주민들이 대대본부에 끌려가면 그걸로 끝이었다. 또한 1949년 봄 귀순공작을 펼치면서 중산간 야산에 숨어살던 주민들이 대거 귀순해 온 곳도 대대본부가 자리한 함덕국민학교였다. 조천면 관내 젊은이들이 자수권유에 따라 자수하러 간 곳도 대대본부였으나 그들은 12월 21일 박성내에서 총살당했다.
대대본부에 끌려간 주민들은 엄청난 고문을 받고 해수욕장 인근의 골연못, 관됫모살, 진동산 등의 모래판에서 죽어갔다. 형식적인 재판조차도 없는 즉결처분이었다.
1948년 12월 29일, 제9연대를 대체한 제2연대(연대장 함병선 대령)가 제주에 들어오면서 함덕에는 3대대(대대장 소령 정준철)가 다시 주둔하게 되었다.
2연대와 북촌사건
이들은 1949년 1월 17일, 300여명 이상의 주민을 한꺼번에 몰살시킨 북촌대학살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들의 휘하에는 서북청년단으로 구성된 특별부대인 11중대가 있었는데, 이 부대는 구좌면 월정리 구좌중앙국민학교에 주둔하면서 구좌면 관내의 패륜적 토벌과 학살로 악명을 떨치기도 했다.
북촌리 출신의 김이숙(44) 씨는 1949년 1월 17일, 무장군인들이 가정에 침입하여 가옥을 전소한 후 함덕리로 강제 인치하여 다음날인 18일날 북촌주민 수십명과 함께 함덕 동쪽 모래사장에서 학살 당했다고 1960년 국회양민학살사건 진상조사특별위원회에 신고되어 있다. 이들은 북촌학살 당시 살아 남았으나 다시 함덕 군부대로 옮겨져 취조를 받은 후 주민 수십여명과 함께 희생되고 만 것이다. 당시 학살집행자는 육군제2연대 3대대 군인들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신고서에 나타난 유족들의 요망사항은 어린 자녀 5명의 어머니가 학살 당하고 보니 생계해결이 어렵다는 애절한 사연이었다.
당시 함덕국민학교는 일주도로변으로 정문이 있었으며, 교사 본관은 남쪽을 향해 있었다. 본관에서 혐의자 수용과 취조 등 대부분의 업무가 이뤄졌다. 본관 뒤편으로 화장실과 숙직실이 있었는데 수용소 역할을 하기도 했다.
또 운동장 왼쪽의 교사 별관은 부대원들의 숙소로 활용되었으며, 교장 관사는 함덕지서가 1948년 5월 13일 무장대의 습격으로 전소되자 이곳으로 이동해 경찰들이 주둔하기도 했다.
서우봉의 비극
또한 함덕리는 중산간 마을이 초토화 되면서 선흘, 대흘, 교래 등 중산간 주민들의 주요 피난처가 됐다. 그들 대부분은 도피자가족 수용소나 함덕리 민가의 부엌, 외양간 등에서 피난생활을 했다. 그 중에서 도피자가족이나 1949년 봄 귀순해 내려온 피난입산자들 중 상당수가 군부대에 끌려가 즉결 처형되거나 육지형무소로 이송되었다.
이처럼 서우봉은 함덕 대대본부에 주둔한 군인들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곳이다.
이 서우봉 절벽에서 1948년 12월 26일 비극적인 총살이 있었다. 희생자의 대부분은 창고 수용소에 있었던 선흘리 주민들이 었다. 이때 외숙 송봉구(50·교래리)를 잃은 고사의 씨는 "희생자 대부분이 집단수용소에 수용되었던 장년층의 주민들이었습니다. '몬주기알'은 가파른 절벽이었기 때문에 절벽 위에서 총을 쏘아 바다로 던져버리려고 이곳에서 총살했습니다" 라고 증언했다.
실제 유족들은 희생 소식을 듣고 절벽 밑 바닷가로 내려가 시신을 등에다 새끼줄로 묶어서 가파른 절벽을 오르며 시신수습을 했다. 서우봉의 서북벽 가파른 경사면을 타고 몬주기알로 가다보면 바닷가에 새의 주둥이처럼 생긴 커다란 바위인 '생이봉오지'에서도 선흘 출신 처녀가 옷이 모두 벗겨진 처참한 모습으로 숨져 있었다고 그는 말했다.
서우봉의 생이봉오지와 몬주기알로 가는 길은 가파르다. 예전에는 여기까지 계단식 밭을 일구어 경작을 했기 때문에 좁은 길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져버렸다. 당시 희생자들이 걸었던 황천길도 험난함을 느낄 정도로 찾아가는 길은 험하다. 당시 군인들이 주둔했던 함덕국민학교는 일주도로 남측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고, 그 옛터는 현재 함덕해수욕장의 주차장과 놀이시설이 들어서 있다.
<4·3연구소 이사 osk4843@hanmail.net>※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이뤄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