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문학의 현장](20)김수열의 '정뜨르 비행장'

[4·3문학의 현장](20)김수열의 '정뜨르 비행장'
육중한 몸 뜨고 내릴 때 부서지는 뼈소리
  • 입력 : 2008. 06.27(금) 00:00
  • /진선희기자 jin@hallailbo.co.kr
  • 글자크기
  • 글자크기

▲하루에 2백여대의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제주국제공항. 정뜨르비행장이 있던 공항 일대는 4·3 당시 학살·암매장지로 추정되는 곳이다. /사진=이승철기자

하루에 수백대 비행기 오가는 제주국제공항
시커먼 활주로 밑에 수백의 억울한 주검 있어
'빠지지지직' 아우성에 잠시 두발 들어올릴 뿐


끔찍한 상상이다. 비행기가 내 몸위로 널브러져 육신이 으깨지는 일. 그곳엔 하루에도 수백대의 비행기가 사람들을 싣고 오르내린다. 그것들은 릴레이 경주하듯 바통을 이어받으며 활주로를 박차고 하늘로 솟아오른다. 제주국제공항, 그곳에선 끔찍한 상상이 현실이 된다.

'시커먼 아스팔트 활주로 밑바닥/ 반백 년 전/ 까닭도 모르게 생매장되면서 한 번 죽고/ 땅이 파헤쳐지면서 이래저래 헤갈라져 두 번 죽고/ 활주로가 뒤덮이면서 세 번 죽고/ 그 위를 공룡의 시조새가/ 발톱으로 할퀴고 지날 때마다 다시 죽고/ 육중한 몸뚱어리로 짓이길 때마다 다시 죽고/ 그때마다 산산이 부서지는 뼈소리 들린다/ 빠직 빠직 빠지지지직/ 빠직 빠직 빠지지지직'('정뜨르 비행장')

태풍 '매미'가 섬을 헤집었던 2003년. 그해 4월 김수열 시인(49)은 '화산도'를 쓴 재일동포 작가 김석범씨를 만난 일이 있다. 그때 김석범씨는 4·3을 묻는 젊은이들에게 제주국제공항으로 변한 정뜨르 비행장 이야길 꺼냈다. 4·3 당시의 수많은 주검이 활주로에 깔려 비행기가 뜨고 내릴 때마다 지금 이시간에도 뼈마디가 바숴지고 있는 사실을 아느냐고 했다.

시인은 그길로 비행장이 눈에 들어오는 다끄내로 차를 몰았다. 서늘한 바람이 시인의 목덜미를 쳤다. 저 시커먼 활주로 밑에 억울한 주검이 있다, 저 주검을 살려내야 한다.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그 말들을 삼키며 그는 세번째 시집 '바람의 목례'(2006)에 실린 '정뜨르 비행장'을 썼다.

시인에게 4·3이 다가온 것은 대학 시절이었다. '나고 자란 섬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란 자문은 그를 섬 구석구석으로 향하게 했다. 불턱에서 해녀를 만났고, 굿판에 이끌렸다. 그에게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를 풀어내던 섬 사람들은 유독 어느 지점에 이르면 입을 잠궜다. 바로 그 지점에 4·3이 있었다. 첫 시집 '어디에 선들 어떠랴'(1997)에 그들의 침묵에 담긴 기억을 꺼내놓는다.

제주섬 마디마디에서 맞닥뜨린 현장에서 시인은 눈보다 귀가 먼저 열렸다. 무수한 소리를 듣는다. 맷돌 일하는 소리엔 '돗통시'에 숨어 지켜봐야 했던 할망의 죽음이 포개진다('고래고는 소리-생화장'). 선흘리에선 흐느끼는 소리, 외마디 비명소리가 귀에 감겨왔다('낙선동'). 전기고문을 받았던 여인에겐 '차르륵 차르륵'('돌리면 차르륵! 돌리면 차르륵!)을, 원통하게 죽은 '아바님'을 찾아나선 4·3행사에서 수줍게 말을 꺼낸 할머니에겐 '가심(가슴)탕탕' 뛰는 소리('그 할머니')를 들었다.

'빠지지지직'은 그것들을 품어안는 통곡의 소리다. 정뜨르 비행장은 1949년 군법회의와 1950년 예비검속에 걸려 희생된 사람들이 학살돼 암매장된 곳으로 추정된다. 1970~80년대 제주국제공항 확장공사 당시 이곳에서 유골을 목격한 사람들 사이에선 '4·3때 나쁜 사람들을 죽인 장소'라는 말이 나돌았다. 제주4·3연구소가 지난해 8~12월 제주국제공항 남북활주로변에서 예비검속 희생자가 묻힌 것으로 보이는 지점을 발굴한 결과 유해들이 한데 뒤엉켜 있었다. 두손이 뒤로 묶여 총살된 후에 그대로 엎어진 유해도 확인됐다.

50여년의 고통은 그래도 대통령의 사과로 한풀 누그러졌다. 그런데, 대통령이 제주도민들 앞에 국가권력의 잘못을 인정하고 고개숙인 시간은 단 3분이었다. '반백 년 넘도록 섬을 할퀴던 바람이 미친 바람이었음을 시인하는 데 걸린 아, / 그 기나긴 시간'이 '팔팔 끓는 물에 라면과 스프를 넣고/ 젓가락으로 휘휘 젓다가 날계란 톡 깨뜨린 다음/ 후후 불면서 입에 넣기 맞춤한 시간'('3분')이라니.

오늘도 달뜬 표정을 한 여행객들이 짐가방을 끌며 제주공항에 내린다. 며칠후 그들은 미끄러지듯 활주로 위를 날아 섬을 뜰 것이다. 바다와 육지를 잇는 그 길에 어느 시절의 억울한 죽음이 있음을 알아줄 이는 몇이나 될까. 시인은 말한다. '이따금 나를 태운 시조새/ 하늘과 땅으로 오르내릴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잠시 두 발을 들어올리는 것/ 눈감고 창밖을 외면하는 것'('정뜨르 비행장').

▲그것은 소문이 아니었다. 활주로 밑에 주검이 있었다. 지난해 제주국제공항 남북활주로변에서 실시된 4·3유해발굴 장면.

활주로 아래 뼈들의 증언

지난해 정뜨르 비행장 유해발굴…내달쯤 4·3 희생지점 추가 조사


그것은 풍문이 아니었다. 두개골은 자잘한 돌멩이들이 흩어진 것처럼 부서졌다. 손과 팔, 다리가 찟긴 채 널려 있었다. 반쪽만 남은 두개골이 보였고 머리를 뚫고 지나간 총알의 흔적도 남아있었다. 뼈만 남은 발에 신겨진 신발만 울음 삼키며 60년을 견뎠다.

길이가 32m, 폭이 1.5m에 이르는 길쭉한 구덩이였다. 한 줄로 길게 세워놓고 죽인 후 뒤도 안돌아보고 자리를 떠버린 것일까. 발굴현장에서 드러난 유해는 되는대로 엎어지고 포개진 모습이었다.

정뜨르 비행장에서 이루어진 4·3희생자 유해발굴에서 또한번 '뼈의 증언'을 들었다. 제주도와 4·3연구소, 제주대학교는 2006년 화북동에 이어 2007년 8월부터 12월까지 제주국제공항이 들어선 옛 정뜨르 비행장 인근에서 유해발굴을 벌였다.

1차 발굴 지역인 남북활주로 서북측 지점은 1950년 8월쯤 군인들에 의해 예비검속 대상자들이 학살돼 암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완전 유해 54구와 부분유해 1천여점이 수습됐다. 도장, 안경, 담뱃대 등 유류품도 6백여점 나왔다.

2차 발굴은 빠르면 다음달부터 진행된다. 이때는 남북활주로 동북측 지점 인근에서 유해발굴이 이루어진다. 1949년 10월 군법회의 사형수 2백49명이 총살돼 암매장된 것으로 보이는 곳이다.

정뜨르 비행장 발굴 지역은 공항 확장공사와 함께 대대적인 평탄화 작업이 이루어졌다. 수미터 파고 들어가야 주검이 살을 맞댔던 흙을 만질 수 있다. 그때가 어떤 시절이었나. 정뜨르 비행장 어디메쯤 가족이 잠들었다는 걸 누가 알까봐 두려웠다. 빨갱이로 몰릴까 유족들은 시신도 거둬가지 못했다. 2차 발굴에서 얼마나 더한 죽음과 맞닥뜨려야 하는지 모른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이뤄지고 있습니다.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112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