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세계유산을 빛낸 사람들](4)-③꼬마탐험대(하)

[제주 세계유산을 빛낸 사람들](4)-③꼬마탐험대(하)
"만장굴 탐사는 고난과 형극의 길"
제주 세계유산을 빛낸 사람들(4)
  • 입력 : 2009. 02.11(수) 00:00
  • 강시영 기자 sykang@halla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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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 기록부 활동 윤경익 옹 육성증언
김녕교 '꼬마탐험대' 합동조사반 총책임은 부종휴
조사·굴지기 등 역할분담·탐사활동 생생히 기억
횃불·짚신 의지 악전고투 속 만장굴 전모 밝혀내


1947년 4월 10일자에서 제주신보는 부종휴가 4월 5일에 새로운 동굴(만장굴을 말함)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전한다. 이 기사는 동굴 탐사가 시작된 배경과 대원, 굴의 규모에 대해 짤막하게 전하고 있지만 실록으로서 의미가 있다.

취재진은 당시 꼬마탐험대의 주역 가운데 생존자들을 추적하던 중 답사과정에 기록부원으로 활약했던 윤경익(78·尹京翊·제주시 일도2동 1030의 15)옹을 수소문 끝에 만나 육성증언과 함께 새로운 사실을 들을 수 있었다. 2월 6일에는 1947년 그가 탐사했던 만장굴 현장을 그의 동료인 안창규(77·제주시 구좌읍 김녕리)옹과 함께 찾았다. 윤 옹은 탐사 당시 김녕국민학교 5학년생이었다. 윤 옹은 60여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만장굴 답사과정을 생생하게 떠올렸다.

그는 1984년 회장으로 있던 김녕중학교총동창회지 '만장'지에 '만장(萬丈)의 근원(根源)을 찾아서'라는 특집에서 만장굴의 어원과 유래에 대해 살피고 만장굴을 최초로 명명했던 인물이 부종휴란 사실과 동굴 탐사과정을 자세히 소개했다.

# 합동조사반 편성

부종휴와 김녕국민학교 '꼬마탐험대'에 의해 만장굴 답사가 시작되던 해인 1946년 봄, 윤경익은 잔병치레로 늦깎이 5학년생이었다.

윤 옹이 '꼬마탐험대'의 일원으로 만장굴 답사에 가담한 것은 6학년 선배들의 1차답사 이후부터다. 선배들의 1차실패를 거울삼아 충분한 기름(횃불용 석유)과 솜, 철사, 양초 등 비상용까지 준비하는 마음의 여유를 가졌으며 5, 6학년 합동조사반이 편성된 총책에 부종휴선생과 5학년 담임, 조사책에 제주농고생 한계추(韓桂秋·작고), 그리고 유사시 연락책인 굴지기에 김옥석(80)이 배정됐다고 한다. 윤 옹 자신은 5학년생으로 기록부에 일을 맡았고 6학년 선배들은 지표 생태조사 임무를 띄게 되었다. 힘이 좋고 체구가 건장했던 6학년 황재정(78·작고) 선배는 무거운 석유통을 짊어맸다고 했다.

탐험에 임하는 대원들은 미지의 세계를 발견한다는 큰 포부와 자부심을 갖고 제1입구인 '들렁머리굴'로 강행군을 시작했다.

기록부로 활약했던 윤 옹은 2m 노끈을 이용, '바를 정(正)'으로 표기해 가며 한 획당 2m씩 기록해 나갔다. '바를 정'자 하나가 완성되면 10m를 전진해 갔음을 표기한 것이다. 길이 험하고 낙반된 바위 투성이라 길 찾기도 어려운 판에 기록이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면이 습해 넘어지는 사례와 상처투성이요, 신발은 짚신이고 보니 그날의 고통은 이루 표현할 말이 없이 고난과 형극의 길 바로 그것이었다.(윤 옹은 이 대목에서 목이 메인듯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6학년 선배들은 주로 지표생태조사를, 우리는 측량업무를 맡아 강행군을 하다보니 나중에는 기진맥진해 되돌아 가자는 주장들이 분분했다. 5,6학년 담임선생끼리 약간의 언쟁도 있었고 끝이 없는 굴이라는 쪽으로 기울어 4800여m 까지 기록해 오다가 결국 중단해 버렸으며 부종휴 선생의 강압(?)에 못이겨 계속 행진이 시작되었다. 박쥐 무리들이 떼지어 날아 다니고 멀리서 만세소리가 울려왔다. 결국 굴 끝인 '만쟁이거멀'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굴 끝에 당도한 탐험대는 햇빛이 쏟아지는 천정이 너무도 높아 바라보기 조차 무섭고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의문을 안은 채 귀로에 오른 우리 탐험대는 의기양양 콧노래를 부르며 걸음을 속행시켜 나아갔다. 최후까지 다행히도 낙반사고나 실족사고 하나 없이 성공리에 끝 마치게 되었고 굴을 나와보니 신발은 다 떨어지고 옷들도 뒤범벅이 되어 미친 탐험대의 별명을 띄게 되었다."

# 지하·지상서 동굴 끝지점 확인

만장굴 끝까지 답사에 성공한 탐험대는 지하에서 확인한 '만쟁이거멀'과 굴 끝이 동일지점임을 확인하기 위해 다음해인 1947년 3월쯤 김녕중학교(1회 졸업생) 선배들은 굴 속으로 들어가고 6학년 졸업반은 육상으로 각각 확인 업무를 띠고 답사에 나섰다고 윤 옹은 기억한다.

얼마쯤 지났을까. 굴속 멀리서 은은히 들려 오는 사람소리와 만세소리가 울려 나왔고 비로소 그들은 지하와 육상에서 만장굴의 끝을 확인한다. "만쟁이거멀이 만장굴의 맨 끝 굴임을 확인한 꼬마탐험대는 미지의 세계를 발견한 자부심과 우월감에 들떠 귀가도 잊은채 들판은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그로부터 부종휴선생은 이 굴을 '만장굴'로 명명하게 되었다."

부종휴와 꼬마탐험대의 이야기는 만장굴의 최초의 역사다. 그런데도 이들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만장굴의 재발견은 바로 이들의 역사를 되찾아주는 일에서 시작돼야 한다. 부종휴와 꼬마탐험대의 '잊혀진 역사'가 복원될 때 만장굴은 다시 부활할 것이며 후세도도 횃불과 짚신에 의미한채 암흑속 지하세계를 넘나들었던 선배들의 호연지기의 참의미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 만장굴 탐사 후기

"기념비라도 세워졌으면…"

만장굴 첫명명 경위 전해져
꼬마탐험대 대원 일부 생존


기인처럼 살다간 부종휴는 생전 좌우충돌이 극심했던 시기에 동굴 답사를 통해 해방감을 만끽했다. 그는 제주도지 제59호(1973)에 '만장굴' 답사에 대한 일단의 심경을 밝힌다.

"동굴에는 밤낮이 없다. 시간의 흐름도 방향감도 공복감도 도시의 소음도 공해도 아직은 동굴속에는 침입이 안되고 있다. 우리들이 처음에 만장굴을 답사할 때의 사회란 해방후이고 보니 이만저만 시끄러운 때가 아니였다. 좌와 우가 충돌하고 보니 국민들은 방향을 못 찾고 있던 때이던 것인데, 모든 것을 잊고 동굴의 끝을 향하고 전진 전진할 때의 그 해방감이란 경험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실감이 안될 줄 안다."

이 기고문에서 그는 '만장굴'의 명명 경위에 대해서도 소개한다. "처음은 굴에 이름이 없고 보니 무명굴이라는 명칭으로 장난삼아 불러오다가 굴이 길고 보니 '만(萬)'자를, 또 끝이 '만쟁이 거멀'이라는 깊은 숲에 둘러쌓인 함정에서 마치고 있고보니 '장(丈·길이의 단위)'을 택해 만장굴이라고 명명했던 것"이라고 적고 있다.

그의 제자인 윤경익(78·당시 5학년)옹은 만장굴의 '만장'의 근원에 대한 글(김녕중학교 총동창회지. 1984)에서 "'만쟁이 거멀'에서 '만쟁이'는 '만장(萬丈)'이며, '거멀'은 '신이 거주하는 곳, 신이 사는 곳'으로 풀이된다. 여름에는 굴 입구에서 내뿜는 시원하고 찬바람이, 겨울에는 따스한 바람이 일어 신이 곧 달려들것만 같은 착각에 소름끼치게 하는 전율과 공포감에 떨게 함도 다 신령이 존재한다는 무서움에서 전래된 것이 아닌가 보여진다"고 했다.

부종휴가 1946년 최초로 결성하고 인솔했던 '꼬마탐험대'의 원년 주역들은 당시 김녕국민학교 6학년생들이다. 6학년생들로 꾸려졌던 꼬마탐험대의 원년 주역들은 30여명에 달했으나 지금은 일부만이 생존해 있을 뿐이다.

"변변한 조명도구도 없어 횃불을 쓸 수밖에 없었다. 석유를 구할 돈이 없어 농작물을 수확한 돈으로 비용을 댔다. 등산화는 엄두도 못냈고 맨바닥을 지탱해준 건 고작 짚신이었다."(신순녕·76·당시 6학년·제주시 거주)

"세계자연유산 등재 얘기가 나올 때마다 부종휴 선생님을 떠올리게 된다. 생존해 있던 제자들도 이제 얼마남지 않았다. 하루속히 선생님의 업적이 재조명되고 기념비라도 세워졌으면 하는 바람이다."(김두전·76·당시 6학년·제주시 거주) /강시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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