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세계유산을 빛낸 사람들](7)-⑥'한라산 박사' 부종휴

[제주 세계유산을 빛낸 사람들](7)-⑥'한라산 박사' 부종휴
제1부 부종휴와 꼬마탐험대
한라산을 손금 보듯… 식물조사·연구에 혼신 바쳐
  • 입력 : 2009. 04.01(수) 00:00
  • 강시영 기자 sykang@hallailbo.co.kr
  • 글자크기
  • 글자크기

▲한라산 식물조사에 심취했던 부종휴(왼쪽에서 두번째)가 생전 한라산 구상나무 숲에서 잠시 포즈를 취했다. 부종휴는 한라산 구석구석을 누비며 수많은 미기록종을 찾아내고 그 가치를 발굴했다.

한라산 식물연구 독보적 위치… 미기록 333종 발표
왕벚나무 자생지 발견 등 학술·자원조사 선구적
국립공원 지정·구획 결정에도 업적… 후학에 귀감


1905년 일본의 학생 신분이었던 이치카와(市河三喜)에 의해 채집된 식물표본 60여점이 일본에 건너가면서 제주도의 식물이 최초로 외부에 알려지게 된다. 일년 뒤인 1906년에는 서홍리 성당 신부였던 불란서인 타케(한국명 엄택기)신부가 수 만점의 표본을 제작하여 유럽의 대학이나 박물관 등에 보냈다.

일본인 식물분류학자인 나카이는 1913년 제주도에서 약 1개월간의 식물조사와 타케신부가 채집한 식물표본을 감정한 후, 1914년 제주도의 식물상을 정리하여 1433 분류군을 발표했다. 1921년에는 미국 하버드대학의 윌슨이 구상나무를 신종으로 발표하며 지금까지도 한국을 대표하는 식물로 평가받고 있다.

해방 후의 제주도의 식물에 대한 연구는 제주의 부종휴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게 현대 식물학계의 솔직한 평가다. 부종휴는 제주의 많은 미기록 식물들의 자생지를 확인하고 제주도의 식물을 연구하는 사람들을 지도하는 등 한라산을 중심으로 제주도의 식물연구에 혼신을 다했다.

# 부종휴와 진해 벚꽃축제

부종휴가 식물학자로서 전국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사건'이 일어났다. 1962년의 일이다. 경남 진해시는 벚꽃축제의 대명사로 명성을 유지해오고 있다. 일본은 우리나라 강점기 진해에 군항을 건설하면서 도시미화용으로 벚나무를 심기 시작했으며, 약 1만평의 농지에는 '벚꽃장'이라는 벚나무 단지를 만들어 관광휴식처로 사용해 왔다. 그러나 진해 왕벚나무가 제주의 부종휴가 없었더라면 모두 잘려져나갈뻔 했던 실화가 지금도 전해진다.

이때 제주출신의 부종휴와 당시 국립과학원장 박만규 박사가 왕벚나무 자생지에 관한 낭보를 전한다. 1962년 제주에서 왕벚나무 자생지가 발견됐다는 소식이었다. 왕벚나무가 거의 잘려져나갈 즈음 진해시가 '벚꽃진해 되살리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한 것은 다름아닌 '부종휴 효과'였다.

# 한라산 국립공원 지정

생전 부종휴의 조사·채집·연구업적은 식물학자 박만규를 통해 알려지기도 했다. 박만규는 국립과학관장으로 재직하던 1962년 제주도 식물조사단 단장으로 입도한다. 당시 조사단 규모는 무려 56명에 달했다. 문화재보존위원회 제3분과위원장이던 박만규가 단장을 맡고 부종휴도 식물조사에 주도적으로 참가한다. 이 때 왕벚나무 자생지가 수악(水岳) 서남쪽에서 발견됐다.

제주도의 동·식물상과 지질을 망라한 최초의 한라산종합학술조사는 이로부터 2년 후인 1964년에 대대적으로 실시됐다. 학술조사의 목적은 한라산을 천연보호구역으로 지정하고 훗날 국립공원 지정을 위한 기초단계인 한라산 자원조사와 더불어 획선(劃線)결정에 있었다. 당시 조사내용은 4년 뒤인 1968년 '한라산학술자원보고서'라는 보고서로, 한라산에 자라고 있는 식물이 양치식물 200종 등 1782종에 이르는 것으로 공식 발표됐다. 한라산이 천연기념물(제182호)로 지정된 것은 학술조사 후 2년이 경과한 1966년 10월12일이다.

이같은 성과의 이면에는 제주의 식물학자 부종휴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는 이미 1964년 약학회지에 '제주도산 자생식물 목록(제1집)'을 통해 제주미기록이 상당부분 포함된 333종을 발표했던 것이다.

# '한라산 자원조사보고서'

국립공원으로 지정된지 3년 뒤인 1973년 제주도는 도내 자연자원을 비롯해 문화재와 유적까지 포함한 종합조사를 실시하고 보고서를 펴냈다. 제주지역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일괄적으로 조사하고 보고서로 묶은 것은 당시로서는 처음 시도된 것이었다.

이 종합조사에는 현용준과 김영돈, 홍정표, 진성기씨 등 각 분야 전문가들이 참여하는데 자연자원분야의 연구책임자는 부종휴였다. 그는 이 때 한라산을 비롯한 천연보호구역과 천연기념물에 대해 풍부한 현장조사 경험과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보호관리대책까지 제시할 만큼 이 분야 권위자다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부종휴가 이 해에 제주 최고 권위의 제주도문화상을 수상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1974년 부종휴는 역작 '한라산 천연보호지구, 자원조사보고서'를 펴낸다. 하지만 이 책 어디에도 부종휴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이 보고서의 가치를 일찍이 알아챈 사람은 '오름나그네' 김종철이었다. 시인 김순이는 "'오름나그네'를 집필하던 남편 김종철에게 그 책은 부종휴 그 자체였다. 한라산에 관한 전문적인 학술서적이 귀하던 시절, 그 책은 망망한 바다의 길잡이었으며 김종철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줄곧 그의 책상 한 켠에 놓여져 있었다. (…)김종철은 그 책 이후에 나온 한라산에 대한 어떤 조사보고서에도 깊은 신뢰를 보내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부종휴는 제주대학교에 식물학과가 개설된 1975년 이듬해 다시 교단에 복귀한다. 당시 식물분류학을 강의할 적임자로 부종휴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 식물학계에 제주출신의 많은 전문가가 배출됐는데 그 씨알은 부종휴였다.

1980년 11월 어느날 그는 55세의 길지 않은 일생을 마감하고 쓸쓸하게 우리의 곁을 떠나갔다. 당시 언론은 그의 부음 소식을 비중있게 다뤘다. "13세 때부터 신비에 가득찬 한라산에 관심을 갖기 시작해 40여년 동안 200여회나 오르고 산에 오를 때마다 알려지지 않았던 희귀식물을 찾아내곤 하여 전국 학계에 한라산식물에 관한 권위자로 인정을 받았다. 산에 심취한 그의 성격 탓으로 한 직장에 1년 이상 근무한 적이 없어 '1년초'라는 별명을 듣기도 했다. 부씨는 동료 산악인들의 손에 의해 한라산이 바라보이는 그의 고향에 묻혔다."

[부종휴를 기억하는 사람들]제주 명사들 "너무나도 벅찬 분"

기인·큰 산·백년초·백과사전 등으로 회고

'오름나그네' 김종철 "흰진달래는 부종휴 꽃"


▲부종휴와 '오름나그네' 김종철은 함께 한라산을 누비며 누구보다 서로에게 깊은 신뢰를 보냈던 관계로 전해진다. 부종휴 유품에서 확인된 빛바랜 사진속의 젊은시절 부종휴와 김종철(사진 왼쪽). /사진=한라일보 DB

부종휴와 가깝게 지냈던 사람들은 그를 '기인', '제주의 큰 산', '백년초', '걸어다니는 백과사전' 등으로 기억한다.

"기인이라 부른 것은 그가 남들은 상상하지도 못하는 일들을 곧잘 생각해내곤 서슴없이 행동을 했고 감정을 속이며 살기를 싫어하는 성격 때문이었다. 한때는 교단에 서기도 했으나 산에 다니고 싶어 교사직도 그만두고 시간만 나면 한라산에 올라 식물과 얘기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생각나면 아무때든 산을 찾았는데 한라산에는 1800여종의 식물들이 그를 반겼기 때문이다."(서재철, 자연사랑 대표)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김상철 전 사무총장은 부종휴를 '제주의 큰산'이라고 했다. "지상에 머무는 잠깐 동안 선생이 남긴 족적이 하도 크고 넓어서 한 마디로 말하기에는 너무나도 벅찬 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선생은 지금 비치미오름 능선에서 발편잠을 하고 계시지만 정작 선생은 한라산 백록담에도 있고, 만장굴, 빌레못동굴, 어느 이름 모르는 동굴 속에도 선생님은 늘 우리와 함께 있다. 나무에도 있고 꽃에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아니 그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 계시다."

시인 김순이씨는 그의 남편인 '오름나그네' 김종철을 통해 부종휴를 더욱 생생하고 절절하게 기억한다.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중반 30대 초반의 젊은 그들은 한라산과 호흡을 밀착시키고 질풍노도의 시대라는 청춘기를 통과했다. 한라산은 그들의 순수한 영혼을 부르는 연인이었으며 열정의 무대였다. 이 때 한라산의 거의 모든 곳을 이 두 사람은 답사하였으며 부종휴는 미기록 식물 등 333종을 찾아 내었다."

김순이의 회고는 이어진다. "동굴이며 지질·암석은 물론이고 선사인들의 혈거생활 유적지 등 그의 관심사와 지식의 영역은 너무나 광범위했다. 그는 바로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이었다. 만장굴을 발견하고서 부종휴는 만장굴이 지니는 가치를 갈파했다.(…) 부종휴가 아니었더라면 한라산 식물의 미기록종들의 발견 또한 20년은 늦어졌을 것이다."

부종휴가 타계한 후, 한라산에 진달래꽃 피어나는 봄날이 오면 김종철은 혼자서 흙붉은오름을 찾아가 하얀진달래를 보고 오곤 했다. "지금도 잘 피어 있던데…, 그 꽃은 누가 뭐래도 부종휴의 꽃이지!"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1 개)
이         름 이   메   일
2639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