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류의 역사,제주-13](2)'지영록'의 중국인 표류기

[표류의 역사,제주-13](2)'지영록'의 중국인 표류기
2부. 외국인의 제주섬 표류기
표류선이 실어나른 제주 밖 국제정치의 흐름
  • 입력 : 2009. 06.26(금) 00:00
  • 진선희 기자 jin@halla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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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는 표류를 낳으며 제주사람들을 중국으로, 중국 사람들을 제주로 예고도 없이 불러들였다. 때때로 표류선은 무역활동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중국 상인 설자천 일행은 베트남에 표류했던 김대황 일행을 무사 귀환시킨 것을 빌미삼아 3년뒤 서귀포 새섬에 정박한 뒤 공공연한 무역행위를 요구했다. 사진은 새섬 전경. /사진=김명선기자

연행 기록이 가르쳐주지 않은 중국측 정세파악 경로
표류인 문답기에 中에 대한 조선 정부의 인식 드러나


조선이 국제정세를 파악할 수 있는 길은 한정되어 있었다. 일본을 오간 통신사나 조선 사신이 북경에 갔던 연행 기록이 전부나 다름없었다. 그것들은 공식적 집단의 서술이라는 점에서 기록자의 시선이 고정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표류는 특별하다. 바다 밖을 벗어난 조선인의 눈에 비친 세상도 그렇지만, 예고도 없이 찾아든 외국인 역시 낯선 땅의 정보를 체득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때때로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섰던 표류인의 운명과는 무관하게.

▶지금 산서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나

제주 사람들이 중국으로, 일본으로, 대만으로 떠밀려간 만큼 그들도 제주섬에 표착한 일이 잦았던 것 같다. 바다를 건너야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있었던 시대였다. 험한 바닷길을 건너야 하는 사람들에겐 늘 표류의 위험이 있었다.

제주목사를 지낸 이익태가 쓴 '지영록(知瀛錄)'에는 '남경표청인기(南京漂淸人記)'등 8건의 중국인 표류기가 실려있다. 대개 표류인들에게 경위를 따져묻는 문정관들의 보고가 달려있는데, 표류에 얽힌 구체적 사실을 묻는 것 뿐만이 아니라 해당 지역의 정치동향을 확인한다.

1652년(효종 3년) 2월 초9일 중국 남경 소주의 상인 묘진실 등 213명이 한 배에 탔다가 정의현 천미포까지 밀려든다. 배가 부서져 익사한 사람이 185명이고 생존자가 28명이었다. 섬서성 출신으로 봉기해 북경을 점령하고 이듬해 피살된 이자성의 난을 비롯해 섬서성, 산동, 산서, 사천성 소식 등을 꼼꼼히 캔다.

정의현감 이탁남이 묻는다. "산서의 소식은?" 중국 표류인이 답한다. "강상(姜祥)이 산서를 점령해 가다가 2년 뒤에 와서 청조가 빼앗았습니다." 다시 묻는다. "강상은?" 중국인이 말한다. "전에 대명(大明)의 총병으로서 청조에 협조를 않고 진산 서쪽 대동부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산서의 8부중 강상이 6부를 얻고는 여러 차례에 걸쳐 청병 수십만명을 죽였습니다. 뒤에 식량이 떨어졌기 때문에 강의 부하 장관이 죽여 바쳤습니다."

'지영록'에 실린 중국 표류인 문답은 청초의 기록들이다. 묻고 답한 내용엔 청나라의 동향을 예의주시하던 조선의 관심사가 배어난다. '지영록'을 번역한 김익수씨(제주도문화재위원)는 "중국 표류인들의 기록은 명말·청초의 혼란기와 청의 통일시기인 성조(聖祖) 시기의 삼번 반란, 대만의 정세를 엿볼 수 있다"고 했다. 또한 "1684년 해금령(海禁令)이 해제되면서 중국 해상무역의 실태를 알 수 있다"고 덧붙였다.

▶"우물안 개구리인 우리 처지 알아야"

▲조선 정부는 표류선을 통해 중국 정치 동향을 파악하려 했다. 청 왕조의 남행 모습.



1667년(현종 8년) 5월 복건성 관상(官商) 임인관 등 95명이 한 배에 탔다가 대정현 예래리 포구끝 해변에서 파선된 일이 있다. 이때 명 숭정제(崇禎帝)의 손자인 영력군(永曆君)의 일을 비롯해 소주, 항주 등의 소식을 세세하게 묻는다. 1670년 향오도(香奧島· 지금의 홍콩)로 들어가 장사하던 중국 상인들이 정의현 지경 말등포 연변에서 파선되었을 때는 대번국(大樊國·대만)이 어떤 곳이며, 군림하는 자는 어떤 사람인지 등을 묻고 있다. 1687년에는 남경 소주 상인이 토산 해변가에 표류한다. 문정관들은 오삼계(吳三桂)의 반란에 대해 캐묻는다. 운남을 다스리던 오삼계는 1673년 청국에 반기를 들고 '삼번의 난'을 일으킨 인물이다.

바다는 외부로 열린 공간이었다. 박제가는 1778년 첫번째 중국 여행에서 돌아온 뒤 쓴 '북학의'(안대회 역)에서 이런 말을 했다. 표류한 경험이 있는 사람 등을 불러모아 중국의 바다 상인을 해마다 10여척씩 불러와 교역하게 하자. 이때 선주를 후하게 대접하되 빈객의 예로써 대우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우리가 그들에게 가지 않아도 저들이 스스로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저들의 기술과 예능을 배우고, 저들의 풍속을 질문함으로써 견문을 넓힐 수 있다. 그리하여 천하가 얼마나 큰 것이며, 우물 안 개구리인 우리의 처지가 얼마나 부끄럽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박제가의 말을 곱씹어본다면, 애써 부르지 않았는데도 제주섬 어느 해변으로 밀려든 표류선은 '우물안 개구리'에게 파문을 던진 존재였는지 모른다.

/ 진선희기자

/백금탁기자 gtbaik@hallailbo.co.kr



뜻밖의 표류사건 무역활동 계기로

새섬 찾았던 중국 선박


1687년 안남국(베트남)으로 표류했던 김대황 고상영(본보 5월 15일자·5월 29일자) 일행이 있다. 이들은 마침 베트남에 머물던 중국 상선 덕분에 제주로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다. 안남국 표류 사건의 인연은 질겼다.

'지영록'에 실린 '남경청인설자천등칭이진사기(南京淸人薛子千等稱以陳謝記)'를 보자. 1691년 9월 28일 복건성 사람 진곤, 설자천 등 33명이 정의현경 서귀포외항 초도(새섬) 동쪽에 정박한다. 이들이 탄 배는 표류선이 아니었다. 베트남에 표류했던 김대황 일행을 조선으로 데려다준 중국 상인 설자천 등이 타고 있었다.

설자천 등은 말한다. "세상은 다시 없는 남다른 은혜를 허락하셨습니다. 이제 큰 일을 겪은 지도 3년이 됩니다. 때때로 깊이 우러러 가만히 하늘을 쳐다보며 생각해보면, 각기 한편 도로 보답을 해야 하는데 미진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들은 제주인을 데려다준 중국 상인에게 베푼 조선정부의 은혜를 갚겠다며 조선국왕과의 면담을 요청한다.

하지만 이들의 사연을 캐물었던 제주 목사는 곧이 듣지 않는다. 배에 동승한 이들이 가지고 온 후추, 단목 따위를 해삼, 포어 등과 바꾸어 고용인들의 밑천을 만들고 싶다는 말 때문이었던 것 같다. 중국 상인들의 행색이 사사로이 통상하는 사람 같다며 속히 돌아가는 게 좋겠다고 거듭 말한다. 그래도 그들은 의지를 꺾지 않으며 떼를 쓴다.

제주목사는 이 일을 조정에 알린다. 결국 "그들의 말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타일러서 거절하라"는 결정이 내려진다. 설자천 일행은 조선정부에서 내린 쌀, 소금, 미역 따위를 받고 제주를 떠난다. 그때가 1692년 2월이었다.

표류가 때로 교역의 계기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이 사례를 비롯해 잠상(潛商), 고표(故漂)등의 표현이 표류선과 얽혀 등장한다. 정민 한양대 교수는 "이는 무역활동에 속셈을 두고 표류를 가장하는 경우가 한중, 한일 간에 이따끔씩 발생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흥미로운 내용"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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