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고을을 다스리던 관청이 있던 성읍민속마을. 특사로 파견돼 제주목사를 만나려 했던 스토우 일행은 정의 고을 부근을 맴돌다 발길을 돌려야 했다. /사진=이승철기자
19C 남원 앞바다 표류한 英 상선 제주인들이 구조
주일영국공사 감사 뜻 특사 파견 조선 접촉 기회로
1653년 제주에 표류한 뒤 13년을 조선에서 보낸 네덜란드인 하멜. 그와 동료들은 하루라도 빨리 조선을 탈출하기 원했을 만큼 이 땅에서 겪은 고초가 컸다. 하지만 모두가 그랬던 것은 아니다. 조건없는 베풂으로 험한 바닷길에서 살아난 이방인을 거둬들인 사람들이 있다.
1878년(고종 15년) 9월 21일. 영국 상선 바바라 테일러호가 제주도 앞바다에 난파한다. 배에 탔던 인원이 얼마였는지 정확치 않다. 다만, 100여명의 도민이 동원되어 나흘간 구조 작업을 벌였다는 기록이 있는 걸 보면 적지 않은 영국인들이 그 배에 타고 있었을 것이다.
# 나흘간 구조뒤 한달간 주식 제공
이 사건은 1997년 우당도서관에서 번역되어 나온 '제주도의 옛 기록'에 소개되어 있다. 글쓴이는 어네스트 사토우(1843~1929). 주일영국공사관 영사를 지낸 사토우는 일본 근무중 영국 상선의 난파로 인해 제주, 부산의 지방 관리와 접촉했던 경험을 일기로 남겼고, 이것이 아사히 신문에 연재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됐다.
바바라 테일러호가 난파된 곳은 어디일까. 사토우는 난파 사건 이후 감사의 뜻을 조선정부에 전달하기 위해 그해 11월 19일 통역관 등과 함께 나가사키를 출발해 제주로 향한다. 이튿날 오전 6시 제주도에 다다른다. 항해중에 약간 거칠어진 바다에서 배멀미를 경험한 뒤였다.
이들은 지금의 서귀포시 남원읍 지귀도 근처에 닻을 내린다. 영국 상선의 선장이 지귀도 부근을 난파 지점으로 지목한 탓이다. 하지만 실제 일행들이 상륙해 알아본 결과 거기서 해안선을 따라 동쪽으로 약 13㎞ 이동한 곳(남원읍 신흥리 인근)에서 난파되었던 것을 확인했다. 사토우는 뒤이어 마을을 다스리던 관리를 만나기 위해 배에서 내려 정의 고을로 이동한 거리가 0.8㎞였다고 기록해놓았다. 둘을 종합할 때 딱 들어맞는 해안마을을 찾기 어렵다. 정의고을 관청이 있던 곳과 가장 가까운 표선면 해안마을에 표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온 섬에 흉년이 들었던 1878년 정의 고을 사람들은 나흘에 걸쳐 지귀도 부근에서 난파된 영국 상선의 선원을 구하고 대부분의 화물을 탈없이 뭍으로 건져올렸다.
주일영국공사는 자국 상선의 난파 소식을 듣자마자 구조단을 꾸린다. 이때 제주에 왔던 영사관 2등보좌관 폴은 그 경험을 보고서로 남겼는데, 거기에는 제주 관리들과 주민들에게 받았던 환대가 넘쳐난다. 폴은 배에 실었던 화물을 건져내기 위해 동원된 주민들에게 금전 사례를 하려 했으나 제주 사람들은 이를 받지 않았다. 우연히 섬에 표착해있던 이탈리아 선원도 영국 상선의 귀환길에 동행해 10월26일 나가사키로 돌아갔다.
# "허가없이 외국 사절 접견 금지돼"
파크스 주일영국공사는 제주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해 깊은 감명을 받았다. 때마침 빗장을 닫아걸고 있는 조선과 접촉할 길을 찾고 있던 그는 어네스트 사토우를 특사로 파견한 것이다. 조선에 대한 고마움을 전달하는 일과 더불어 조선측과 적극적인 접촉을 꾀해 무역 관계 등에 대해 가능한 한 많은 정보를 수집하는 목적이 동반됐다.
하지만 사토우 일행의 제주 여정은 삐걱거렸다. 제주목사를 면담할 기회를 가지려 했지만 반응이 없었다. 사토우는 제주섬 관리들이 여러 핑계를 대며 만남을 회피하고 있음을 직감했다.
사토우는 1개월에 걸쳐 조난한 영국 선원에게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한 일, 거기다 화물을 건져내기 위해 많은 노동력을 동원해준 일에 대해 정의군수에게 거듭 감사를 표한다. 앞으로 조난이 일어났을 경우 구조 비용을 조선측에서만 부담하는 것은 공평하지 못하다는 말도 덧붙인다. 정의군수는 묵묵부답이다. 제주에 머무는 동안 그들에게 돌아온 반응은 "조난선을 구조하는 것은 각국 공통의 의무이니 감사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 제주목사가 상급기관의 특별허가를 받지 않고 외국 사절을 접견하거나 서한을 수령하는 것은 국법에 반한다"였다.
당시 제주는 온 섬에 흉년이 든 해였다. 제주 목사 백낙연이 제주·대정·정의 세 고을의 굶주린 백성들에게 진휼을 베풀었음을 조정에 알린 기록이 있다. 그런 시기에 낯선 땅에서 찾아든 이들을 품어 살렸다. 백성들의 순수한 마음과는 무관하게 영국측에선 이 일로 쇄국하의 조선에서 돌파구를 찾으려는 일에 우선이었다. 면회에 응하지 않았던 제주목사를 언급하며 사토우는 부산에서 만난 조선인 관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제주도는 수도인 서울로부터 멀리 떨어진 변경지역이며 그 주민은 무지하다. 그들이 이국인의 얼굴을 보고 놀래서 우리들과 관계를 갖는 것을 거부해도 이상할 것 없다."
우도에 출몰한 사마랑호
20일간 머물며 제주도 정밀탐사
이상한 모양의 배라는 뜻의 이양선(異樣船). 난바다에 출몰해 미끄러지는 속도로 물살을 가르던 이양선에 조선 수군과 어민은 넋을 잃었다. 표류선은 예외지만 조선 정부는 서양 선박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서양 선박이 측량이나 통상, 선교 등을 요구하면 단박에 거절했다. 박천홍은 '악령이 출몰하던 조선의 바다'(2008)에서 서양의 이양선들이 조선 해역에 본격적으로 출몰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말부터라고 했다. '탐험'과 '발견'이라는 이름으로 곳곳에 식민지를 건설한 유럽 국가들은 거대한 상품 시장과 선교 기지를 찾아 동쪽으로 이동해 나간 것이다. 제주로 찾아든 이양선중 눈에 띄었던 게 영국 군함 사마랑호. '헌종실록'에 사건의 개요가 서술되어 있는 등 조선측 사료에 사마랑호에 얽힌 기록이 여럿 있다. 1845년 6월 우도에 사마랑호가 출몰한다. 에드워드 벨처 함장이 이끄는 사마랑호는 그해 8월까지 제주도와 거문도를 항해하면서 우리나라 남해안을 정밀 탐사했다. 이들은 조선인들에게 "황제의 명을 받들어 여러 산을 그리는데, 가는 곳마다 경치 좋은 곳에 탑을 쌓아 기를 꽂고 하늘에 빌며 그림을 그린다"고 말한다. 사마랑호에는 200명이 타고 있었는데 별방진, 화북진, 차귀진, 마라도, 범섬 등을 항해하며 20일간 제주에 머문다. 벨처는 우도를 영국 수로국장의 이름을 따서 '뷰포트 섬'으로 명명했고 한라산을 여러 지점에서 관측한 결과 높이가 6544피트(1995미터)로 계산해낸다. 그는 퀠파트(제주도)가 화산섬이고 조선의 유형지 가운데 한 곳일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사마랑호가 홀연히 떠난 뒤 제주목사 권직은 변방의 경비를 소홀히 한 죄로 정의현감, 제주판관, 대정현감을 파면했다. 벨처 일행이 제주인들에게 나눠준 종려나무 부채 등을 찾아내 모두 봉한 뒤 비변사로 올렸다. 제주목사 권직도 얼마뒤 조선 정부에 의해 감봉이 결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