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류의 역사,제주-22](5)표류가 교류의 씨앗 되어

[표류의 역사,제주-22](5)표류가 교류의 씨앗 되어
3부. 김비의와 오키나와
섬 도는 찻길 생겨도 멧돼지 잡았던 산은 옛 모습
  • 입력 : 2009. 09.25(금) 00:00
  • 진선희 기자 jin@halla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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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을 떠나는 젊은이도 있지만 섬을 찾아드는 젊은이도 있다. 도쿄 출신인 30대의 청년도 이리오모테섬에 정착해 벼농사를 짓는 농부가 되었다. 이리오모테섬은 20년전부터 무농약 쌀을 재배하는 농법을 시행하고 있다. /사진=진선희기자 jin@hallailbo.co.kr

이리오모테섬 풍습 요나구니와 비슷해 짤막하게 언급
김비의 송환 530주년 맞춰 다음달 제주·일본 민간 교류


섬과 섬을 잇는 뱃길의 통로인 오키나와현 이시가키(石垣)항에서 40분쯤 걸려 도착한 이리오모테(西表)섬. 이시가키 아키코(石垣昭子·70)씨가 일찌감치 섬의 항구에 나와 있었다. 그와 동행해 마을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싣고 10분쯤 이동하니 우거진 나무 아래 있는 쿠루(紅露) 공방이 눈에 들어왔다.

이시가키씨는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아내 손수 순박한 천을 짜는 여성이다. 섬에서 나는 식물로 천연염색한 그의 천은 도쿄는 물론이고 멀리 뉴욕에서 전시될 정도로 이름나 있다. 30년 경력의 '직녀'인 그는 섬 여성 5명과 함께 공방에서 전통적 방식으로 직조한다. 나무와 나무가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날줄씨줄로 엮이는 실은 거친 바람속에도 섬의 정신을 붙들어온 지난 세월을 말해주는 듯 했다.

▲이리오모테섬의 이시가키 아키코씨가 공방에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천을 짜고 있다.

# 코 뚫어 검은 나무 꽂은 부인들

김비의 일행이 '소내섬'으로 구술한 소나이(祖納) 마을에 살았던 때는 1477년 음력 8월부터 5개월 내외다. '성종실록'에 언급된 이리오모테섬은 요나구니섬만큼 상세하지 않다. 6개월 가량 표착지인 요나구니에 머물면서 이미 섬의 의식주를 상세히 풀어놓았고, 이리오모테섬의 풍습이 그곳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소내섬은 좁고 길게 뻗은 섬으로 둘레가 가히 4~5일 걷는 거리입니다. 그 언어·음식·의복·집 모양새·풍속들은 대개 윤이섬(요나구니섬)과 같았고, 우리들을 먹여주는 것 또한 동일하였습니다."

그래도 몇몇 풍속을 빠뜨리지 않았다. 섬의 부인들이 코를 양쪽으로 뚫어 조그마한 검은 나무를 꽂았다는 견문이 눈에 띈다. 이 대목을 두고 어떤 학자들은 류큐왕국 영토내에 살았던 인도네시아 보루네오 사람들의 풍습과 연관짓는다.

섬 서쪽에 있는 소나이는 코미(古見), 호시타테(星立)와 더불어 오래전부터 존속한 마을이다. 1920~30년대까지도 섬에는 큰 도로가 없었다. 마을을 오가려면 간조때 해안선을 이용하거나 바닷길에 의지해야 했다. 지금은 이시가키항에서 고속선이 출발하고 도로 포장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없다. 섬을 한바퀴 도는 찻길이 생겼지만 섬은 옛 모습을 크게 잃지 않았다.

▲이리오모테섬은 제주도 못지 않은 '신들의 섬'이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섬 사람들은 늘 그 땅에 깃든 신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

# "선조가 이 섬에 많은 신세를 졌다"

이리오모테섬엔 현재 2000명 가량이 산다. 관광 시즌이 되면 섬에 머무는 사람들이 두 배로 늘어난다. 20년전쯤 무농약 자연재배 벼농사를 통해 섬을 부흥시키려는 움직임이 시작됐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무농약 쌀은 가격이 갑절 비싸지만 안심해서 먹을 수 있는 농산물로 인식돼 일본 전역에서 소비된다.

소나이 사람들은 섬을 거쳐간 제주 표류인들에 대한 기억을 전승하고 있을까. 이시가키 아키코씨의 남편인 소나이 공민관장 이시가키 긴세이(石垣金星·63)씨는 우연히 도서관에서 관련 자료를 접하면서 김비의를 알게 됐다고 한다. 섬은 오래전에 바닷길로 흘러 들어온 이방인의 존재를 일찍이 세월의 파도속으로 떠나보냈을지 모른다.

이런 현실에서 1994년 어느 사진가의 방문은 섬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지금은 고인이 된 제주 출신 김수남이 바로 그다. 수백년 동안 소나이에 전해온다는 '시치이(節祭)'라는 축제를 카메라에 담기 위해 섬을 찾았던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지금으로부터 500년전에 내 섬의 선조가 아주 많은 신세를 졌다." 김비의 일행이 수개월간 섬에서 매 끼니를 제공받으며 살다 무사히 떠난 데 대한 감사의 인사였다.

섬과 섬이 만난 기억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가 밀물처럼 다시 밀려드는 것 같다. 김비의 일행이 제주로 돌아온지 꼭 530주년이 되는 해, 제주와 이리오모테섬 사람들이 다음달 이리오모테섬에서 '제주·오키나와의 표류·교류 530주년 기념 간담회'를 연다.

/오키나와현 이리오모테섬=진선희기자

소나이공민관장 이시가키 긴세이씨 "자연에 감사의 노래를"

이시가키 긴세이(石垣金星·63)씨를 만난 것은 이시가키시에서다. 그는 섬을 빠져나와 비행기를 타고 오키나와 본토 나하로 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독립운동 하러 갑니다. 오키나와는 원래 독립국이었습니다. 우리의 것은 우리가 결정해야 한다는 겁니다. 지금은 미국과 일본 정부의 간섭 때문에 우리 고유의 것을 찾지 못하고 있어요. 독립한다고 해서 일본과 적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친구가 되어야지요."

꽁지머리를 한 이시가키씨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제주 표류인이 다다랐을때의 섬이 독립국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이리오모테의 선인(仙人)'으로 통하는 그는 섬의 대부분을 덮은 원시림을 구석구석 보러다니고, 잠을 자던 중에도 조난자가 생겼다는 말을 들으면 가장 먼저 용감하게 달려나간다.

이시가키씨에게 이리오모테섬은 자연, 인간, 야마네코(들고양이), 신(神)이 공존하는 곳이다. 그는 손가락을 하나씩 꼽으며 그 네가지를 거명했다. 자연과 공생하며 살아가는 섬 사람들의 일상이 눈에 밟히는 이야기였다.

20년전 무공해 벼농사에 뛰어들었던 그는 낮에는 농사 짓고, 밤에는 전통주인 아와모리를 마시며 사미센을 켜고 노래를 한다. 그의 노래는 자연과 신에게 건네는 말이다. 모내기를 할 때는 잘 자라도록 노래를 부르고, 벼를 수확할 때는 감사의 노래를 흥얼거린다.

소나이공민관장인 그는 일년에 한차례 타이완 원주민과 교류를 벌이고 있다. 멧돼지를 내용으로 심포지엄을 열기도 했다. 김비의의 이리오모테섬 표류기에는 산에 돼지가 있고 창을 든 사람들이 개를 끌고가서 그것을 잡아 먹는다는 내용이 쓰여있다.

타이완 교류 사업은 지난해부터 시작됐다. 그는 타이완처럼 제주와 이리오모테섬도 섬과 섬을 잇는 교류가 이어지길 바랐다.

"제주 사람들의 표류기는 이리오모테섬에 대한 첫 기록이어서 표류인에 대해 늘 감사의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이 마음을 제주사람들에게 꼭 전해주었으면 합니다."

※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이뤄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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