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류의 역사,제주-29](12)2년반, 마침내 귀향길에

[표류의 역사,제주-29](12)2년반, 마침내 귀향길에
3부. 김비의와 오키나와
바다밖 열린 세상 마음에 품고 다시 제주 바다로
  • 입력 : 2009. 12.11(금) 00:00
  • 진선희 기자 jin@halla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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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본토의 중심도시인 나하에서 가장 번화한 지역인 국제거리 풍경. 전통시장, 백화점, 토산품 판매점 등이 모여 있어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사진=진선희기자 jin@hallailbo.co.kr

나하에서 3개월 보낸 뒤 일본 본토 상인과 귀국길
류큐 표류 조선인 송환 루트 김비의 표류기에 상세

1477년 2월, 그들은 제주섬과 오래도록 이별하리라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제주사람 김비의, 강무, 이정. 이들 세 사람은 1479년 6월 집으로 돌아가기까지 2년여를 오키나와와 일본 본토에서 보냈다. 8명이 한 배에 올라 제주를 출발했지만 살아남은 자는 결국 김비의 등 세 명이었다.

# "가까운 일본 거쳐 우릴 데려다주오"

일본 최서단 요나구니섬에 표착해 이리오모테, 하테루마, 구로시마, 타라마, 이라부, 미야코섬을 거쳐 오키나와 본토 나하에 도착한다. 이들 섬에서 보낸 시간은 길게는 6개월, 짧게는 1개월 안팎이다. 이들이 조선으로 돌아왔을때 "거쳐 돌아온 여러 섬들의 풍속이 아주 기이하였으므로 임금께서 홍문관에 명하여 그 이야기를 글로 써서 아뢰도록" 한다. 명민하게 섬의 풍속을 기억해낸 이들 세명은 어제일처럼 섬에서 보고 들은 내용을 구술했고 이것이 조선왕조실록으로 전해지고 있다.

▲오키나와현청에서 펴낸'오키나와의 문화'에 실려있는 류큐왕국 시대 나하항을 묘사한 그림.



지난 7월 나하의 국제거리. 오키나와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하에서 기적처럼 일궈낸 거리다. 총 길이 2㎞쯤 이르는 이곳은 오키나와현의 중심 도시인 나하에서 가장 번화한 곳으로 통한다. 평일 낮인데도 거리를 오가는 관광객과 시민들의 물결이 이어지고 있었다. 김비의 일행은 아마 오키나와 본토에 체류하며 지금의 국제거리 풍경 같은 화려함과 마주했을 것이다. 그럴수록 고향땅을 향한 갈망은 커져갔던 게 아닐까. 성종실록에 '포랄이섬'으로 표기된 아라구스쿠(新城)섬에 체류할 때부터 김비의가 두통을 앓았던 것도 지독한 향수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1478년 8월 초하루, 김비의 일행은 나하를 떠난다. 나하에서 3개월을 보낸 이들은 통역관에게 조선으로 돌려보내줄 것을 청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졌다. 당초 류큐국왕은 "일본 사람들은 성질이 포악하여 가히 보존할 수 없으므로 너희들을 남쪽 중국으로 보내고자 한다"며 중국을 경유해 조선으로 송환하는 루트를 염두에 뒀다. 하지만 김비의 일행의 생각은 달랐다. 통역관에게 물어 일본이 가깝고, 중국이 멀다는 정보를 알고 있던 터라 일본 본토를 거쳐 고향으로 돌아가길 원했다. 마침 하카타(博多)의 상인 신시라가 류큐국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국왕에게 "우리나라가 조선과 사이좋게 교통하고 있으니 이들을 데리고 보호해 돌려보내도록 하겠다"는 뜻을 전한다.

# 표류인 쇄환 통교와 무역 기회 제공

조선 사람이 오키나와에 표류한 사례는 김비의 일행 전후에도 있었다. 이들은 어떻게 조선으로 돌아왔을까. 김비의 표류기록에 송환 루트가 상세하다.

나하항을 출발한 김비의 일행은 100여명이 타고 있는 큰 배에 올라 4일 밤낮을 항해해 사츠마(薩摩)에 다다른다. 거기서 1개월을 머문 뒤 9월이 되자 다시 짐을 꾸려 하카타-이키-쓰시마를 거쳐 1479년 5월 3일 마침내 염포(울산)에 발을 딛는다.

이같은 루트를 통해 나하에서 조선까지 향하는 데 걸린 시간은 1년에 가까웠다. 이 기간동안 류큐국은 적지않은 물품을 부담해야 했을 것이다. 류큐국왕이 나하를 떠나는 김비의 일행에게 내린 물품만 해도 돈 1만5천문, 후추 150근, 청색 물들인 베와 중국 무명 각 3필, 두달치 양식 560근, 소금, 간장, 젓갈, 왕골 자리, 옻칠을 한 목기, 밥상 등이었다. 하카타 상인은 류큐국에서 받은 쌀과 반찬으로 김비의 일행의 세 끼니를 챙겼다.

이훈은 '조선과 유구'에 실린 '인적 교류를 통해서 본 조선·유구 관계'란 글에서 "유구가 많은 비용과 시간을 들여서 조선인 표류민들의 일부를 쇄환해 왔던 것은 피로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조선과 통교·무역의 기회를 확대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류큐에서 표류인을 송환해오면 조선에서는 이들에게 답례품을 전했다. 김비의와 동행한 신시라 일행도 면포 200필 등을 받아갔다.

표류했던 김비의 일행에겐 2년동안 부역이 면제됐고 6개월치 쌀과 의복 등이 제공됐다. 1477년 2월, 바다밖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났던 김비의 일행은 그로부터 2년여 뒤인 1479년 6월, 눈물나게 그립던 제주로 향하기 위해 바닷길을 건넌다. /오키나와현 나하=진선희기자

※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이뤄지고 있습니다.



"류큐의 조선어 전문 통역 표류인 통해 외국어 익혀"

김비의 표류기로 본 통역


"우리들은 저들과 언어가 통하지 않았지만, 오래 그 곳에 머물면서 말하는 것을 조금 알게 되었습니다."

일본 최서단 요나구니섬의 견문을 털어놓으면서 김비의 일행은 그렇게 말했다. 요나구니섬은 김비의가 6개월 가량 체류했던 섬이다. 그들의 말을 조금 알아듣긴 했지만 의사 소통에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요나구니섬을 출발해 여러 섬을 경유하는 동안 그같은 어려움은 더욱 커져갔을 것이다.

김비의 표류기에 통역관이 등장하는 것은 이들이 오키나와 본토 나하에 도착해서였다. 김비의 일행에게 어느 나라 사람이냐, 어떤 사연으로 표류했는가를 물은 뒤 제주 사람들의 답을 글로 적어 국왕에게 알렸다는 대목이 나온다. 김비의 일행이 조선으로 돌려보내줄 것을 맨 처음 청한 일도 통역관을 통해서다.

상대국의 언어를 알면 낯선 문화를 좀 더 가깝고 깊이있게 접촉할 수 있다. 김비의가 오키나와의 외딴 섬 사람들과 한층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었으면 성종실록 표류기는 지금 전해오는 내용과 다른 빛깔을 띠었을 지 모른다.

오키나와에 존재했던 조선어 통역관. 그 첫 머리에 표류인이 있지 않았을까. 1453년 5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자. 과거 조선인 60여명이 류큐에 표착해 5명만 살아남았는데 그들의 아들·딸은 이미 류큐인과 결혼해 살고 있고 노인들은 아직도 조선말을 구사한다는 내용이 있다. 조선말을 할 줄 알았던 이들이 통역 1세대였을 것으로 보인다.

김비의 표류기엔 '류큐국 사람들과 통역관이 와서'라고 쓰여있다. 류큐 사람중에 전문 통역을 둔 게 아니라 조선과 류큐를 왕래하던 상인중에 조선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그 일을 담당했던 게 아닐까란 추정이 가능하다.

조선어 전문 통역이 확인되는 시기는 18세기 이후부터다. 이훈은 일본측 사료를 인용해 "1733년·1794년·1865년 류큐에 표착한 조선인의 표착 경위 조사시에는 '조선통사'가 표착지에서부터 이송 과정 내내 동행했으며 그들의 입회하에 조사가 이루어졌다"면서 "류큐의 조선어 통역은 1696년의 표류민 송환절차 변경 이후 조선인도 청을 통해 우회송환하게 되면서 이 업무를 원활히 추진하기 위해 특별히 양성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고 밝혔다.

류큐의 조선어 통역자들에게 표류인의 발생은 외국어를 갈고 닦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류큐의 조선어 통역 담당은 표류인들이 머물던 숙소를 드나들며 조선어를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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