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문화유산을 찾아서](5)옛 등대-④다시 세워지는 등대

[해양문화유산을 찾아서](5)옛 등대-④다시 세워지는 등대
허물어진 돌 등대 일으키는 복원 움직임 곳곳
  • 입력 : 2010. 04.02(금) 00:00
  • 진선희 기자 jin@halla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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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월 옛 등대의 변천사를 보여주는 사진들. 사진 위는 몸통 윗 부분이 날아간 채 90년대까지 포구에 서있던 모습. 가운데는 2000년 등대 꼭대기에 문을 달고 지붕을 씌워 보수한 모습이다. 이들 사진은 애월항개발추진위원회에서 보관하고 있는 자료다. 그러다 2003년에는 등대를 허물어 반듯하게 깎은 돌로 옛 모습을 재현(사진 아래)해놓았다.

해양유산 흔적 좇아 해안가 마을 '도대불' 조성 잇달아
잊혀진 등대 발굴 등 성과 있지만 엉뚱한 복원 사례도

제주시 애월읍 신엄리 해안가. 소나무로 둘러싸인 그곳에 희미하게 남은 돌계단이 있었다. 신엄 앞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위치였다. 이름없는 돌덩이들이 뒹굴던 그곳에 등대가 있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애월읍연합청년회는 2008년부터 1년 가깝게 마을 노인들의 증언을 듣고 자료를 조사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지난해 9월 '신엄 도대불'이 태어났다.

▶눈부셔라, 그 시절 바다 밝히던 불빛

등대는 바다의 교통 신호등 같은 역할을 한다. '육지'에서 생활하다보면 바다는 늘 조용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수심의 높낮이가 다르고 암초를 품은 바다엔 눈에 보이지 않는 위험 요소가 있다. 등대는 그같은 바닷길을 건너는 이들을 위한 신호등이다.

전깃불이 없던 시절, 제주 사람들은 소나무 뿌리 부근에서 생겨난 송진을 이용한 솔불, 나물기름불 등을 사용했다. 그러다 석유가 보급되면서 솔불이나 기름불보다 밝기가 세진 '등피'를 썼지만 여의친 않았다. 원로 민속학자 현용준씨는 '제주도 사람들의 삶'에서 "솔불이나 기름불 등 보다 석유조명이 훨씬 나은 것은 사실이나 일제의 석유배급이 적어 제주백성들은 제대로 불을 밝히고 살지 못했다"고 썼다.

옛 등대 역시 동식물성 기름을 사용하는 사례가 잦았다. 등대를 활용했던 후대로 갈수록 석유 등을 밝혔다는 말이 나온다. 그럼에도 그 시절의 등대 불빛은 환했다. 지금처럼 한밤중에도 집집마다, 거리마다 불을 밝히던 때가 아니었다. 옛 사람들에겐 홀로 밤을 비추는 저 멀리 등대 불빛이 또렷이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돌로 등대를 쌓아올리기 전에도 다르지 않다. 누군가 해안가에서 불빛을 만들어 등대 노릇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즈음 제주에선 옛 등대를 다시 세우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애월읍연합청년회는 구엄~신엄 포구 4㎞ 해안도로에 해양 관련 유산을 복원하는 장기 계획을 세우고 그 첫 사업으로 '도대불'을 조성했다. 당시 회장을 맡은 변홍문씨에 따르면 옛 등대의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던 신엄리에 1970년대까지 '도대불'이 쓰였다. 그동안 구엄리에 남아있던 것은 1960년대 후반에 조성된 '도대불'로 이전엔 방사탑 모양으로 쌓아 그 위에 나무를 세워 불을 켰다. 나무 기둥이 삭아 제 기능을 못하게 되자 이를 해체하고 직사각형 기단에 마름모꼴로 등대를 축조했다.

▶'도대불' 유래 안내판 억지 주장

'혼인지'마을인 성산읍 온평리에도 '도대불'이 있다. 온평리를 거치는 제주올레 코스에서 해설사로 활동하고 있는 고승천씨(69)는 "70년대말까지 도대불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면서 "지금은 해안도로가 생겨 지형이 달라졌지만 언덕처럼 높은 곳에 도대불이 있었다"고 했다. 현재의 '도대불'은 마을 청년회에서 조성했다. 그 모양이 경주의 첨성대를 닮았다.

배 몇척이 외로이 떠있는 애월리 옛 포구에도 등대가 있다. 포구 앞바다와 마주한 여느 옛 등대와 달리 애월 등대는 눈여겨보지 않으면 그 존재를 모른다. 주변 지형보다 우뚝 섰던 등대가 바다를 메우고 해안도로를 내면서 낮은 곳으로 가려졌다. 건립자가 분명한 이 등대는 애월항개발추진위원장을 지낸 김관진(85)씨 등 후손들에 의해 보존되어오다 2003년 새롭게 제작됐다.

제주시 건입동은 지난해 도내에 흩어진 옛 등대를 재현해 마을에 있는 산지등대와 연계한 등대 거리를 꾸몄다. 건입동 박물관 마을 만들기 프로젝트의 하나였다. 제주시 용담동, 한림읍 귀덕리 등도 일부 보수하거나 새로 세웠다.

옛 등대에 대한 지역의 관심이 늘고 있는 것은 고무적이지만 일각에선 우려의 목소리가 있다. 복원 과정에서 오히려 옛 모습을 망치는 일이 있어서다. 지난 역사를 기억하는 돌을 아예 치워버리거나 모양을 달리 바꿔놓는 것이다. '도대불'의 유래를 쓴 안내판에 입구를 뜻하는 제주어 '도'와 돌 등을 쌓은 시설물 대(臺)가 합쳐진 말이라는 '억지 주장'을 담은 곳도 있다.

애월 등대 불피웠던 강항윤씨 "가파른 계단 올라 까치발 열네살때 등댓불 켰지요"

"14살때 8개월동안 불을 켰던 기억이 있습니다. 날씨가 좋은 날 불을 켜고 나면 출어했던 배의 어부들이 돌아올 때 생선 1마리씩 꼭 갖다줬습니다."

'도대불'은 전깃불이 들어오기 전인 1970년대까지 사용했다. 이 때문에 그에 얽힌 사연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이들이 살아있다.

제주시 애월읍 애월리의 강항윤(73)씨도 그중 한 명이다. 그는 애월 포구에 있던 옛 등대에 불을 켜는 일을 맡은 적이 있다. 1930년대 등대를 세운 것으로 전해지는 애월어업진흥회 김봉하 회장(작고)의 권유로 등댓불을 밝혔다. 품삯은 생선이었다. 곤궁했던 시절, 그 일은 어린 강씨에게 적지않은 도움이 됐다.

"그 전에 불을 켜던 분이 다른 일을 하게 되니까 내가 맡게 됐습니다. 육지로 나가 살기 전까지 등대 일을 했습니다. 밤 8시에 불을 켜놓으면 날이 밝을 때까지 환했습니다. "

강씨는 유리로 된 등불 보호대를 닦다가 여러차례 깨졌던 기억 등을 어제일처럼 풀어냈다.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 까치발을 하고 등댓불을 켰던 소년은 마을의 고깃배는 물론이고 인근에 있던 배들이 등대를 길잡이 삼아 들어오는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뿌듯했다고 한다.

애월 옛 등대는 김봉하 회장의 후손들이 몇차례 보수했다. 등대의 상단이 잘려나간 채 방치되어 있던 것을 안타깝게 여겨 2000년 지붕을 씌웠다. 그러다 2003년에는 애월항개발추진위원회 주관으로 등대를 완전히 허물고 그 자리에 곱게 다듬은 돌로 옛 모습을 재현해놓았다. 외양은 번듯해졌지만 소박한 아름다움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도 강씨는 "꼭대기에 유리문이 달려 있어서 과거의 등대를 보는 것 같다"면서 "등대가 사라지지 않고 오랫동안 한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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