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특별자치도가 밝힌 개방형 직위 공모에 도민들의 관심이 쏟아지고 있다. 도정이 밝힌 개방형 직위는 매우 과감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동안 행정직으로 채워졌던 정책기획관과 이번에 신설된 수출진흥본부장(3급)을 비롯하여 4급인 공보관, 도시디자인 단장, 국제자유도시과장, 수출진흥관, 환경자산보전과장, 식품산업과장, 서울사무소장, 5급에는 도의회 정책자문위원(4명), 시장개척담당 등 10여명에 이른다. 우 도정이 공직사회를 과감하게 변화시키겠다는 의지가 돋보인다. 하지만 의욕에 찬 실험이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얼마만큼 적재적소(適材適所)의 인재를 뽑았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필자가 30여년간 공직과 언론에서 지켜 본 인물 중 개방형 직위로 가장 성공을 거둔 사례를 든다면 주저 없이 고(故) 홍순만 선생을 들겠다. 홍 선생은 1962년 김영관 도지사 시절, 모 중앙지 주재기자로 일하다 도청 문화공보과장으로 발탁돼 30여년간 재직한 뒤 퇴임해 향토사학자로서도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홍 선생이 처음 한 일은 '제주도'지 창간이었다. 이 책은 관공서의 시책은 물론 당시 저명한 문화예술인, 도내외 학자들에게 지면을 할애함으로써 전국 대학도서관에서 정기 구독 요청이 쇄도했다. '제주도'지는 몇년간 폐간되었다 복간되는 곡절(曲折)을 겪으면서도 50년 가까운 세월동안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제주도 문화상'도 1962년 만들어졌다. 지금처럼 여러 분야의 대상자로 나뉘기 전에는 그 해 최고의 단 한 사람을 뽑았다. 그 만큼 영예로운 상이었다. 첫 해는 향토사학자인 홍정표선생, 다음 해에는 국문학자 현평효선생이 영광을 차지한 것으로 기억한다. '제주도문화상'은 서울시와 같은 해에 전국에서 가장 먼저 제정되었다. 문화예술축제도 그 때 꽃 피었다. 당시만 해도 제주는 문화예술의 불모지나 다름 없었다. 그러나 제주예술제를 한라문화제(탐라문화제 전신)로 확대하면서 신라·백제문화제와 더불어 국내 3대 문화제로 성가를 높였다. 사라봉 의병비 및 의녀 김만덕비 건립도 그 때 세워지는 등 문화예술과 문화재 행정이 가장 진취적(進取的)인 시기였다.
이러한 공적이 홍순만 선생 개인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물론 아니다. 여기에는 도정책임자의 신뢰와 도내 문화예술인, 학자, 언론인들과 폭넓은 교류를 통해 그들의 제안을 수렴하며 이를 정책에 반영시킨 결과다. 사실 그는 중앙 문화예술인들과 매우 가깝게 접촉해 왔는데 생계가 어려웠던 피난민 소설가 고 최현식 씨와 도내 문인들을 '제주도지' 편집자로, 고은 선생에게 시집을 펴내도록 주선한 것도 그였다. 이러한 풍토속에서 제주의 문화행정, 나아가 제주문화예술은 한 때 전국에서도 가장 앞서면서 풍성한 텃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홍 선생이 향토사에 기여한 부분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자 한다)
이같은 사례는 민간에게 크게 열어 놓은 개방형 직위제가 공직사회를 넘어 제주사회발전에 얼마나 중요한 시도인가를 가늠하게 한다. 역사도, 미래도 결국은 인재들이 만들어 나간다. 도정이 민간의 전문가들을 끌어들이는 참 뜻도 여기에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우려의 눈길을 거두지 않고 있다. 선거캠프에 몸담았던 사람들을 위한 호구지책으로 삼으려 한다는 시각이 그것이다. 이는 주요 개방형 직위에서 보여준 구태의연한 인사행태 때문이다. 핵심은 공기(公器)에 인사권자의 사심을 담아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그게 개방형 직위 도입의 성패를 가름하는 첫걸음이며, 그에 따라 우 도정의 역사적 평가도 달라 질 것이다.
<논 설 실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