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지인 몇몇과 제주자치도와 제주대학교가 마련한 추사유배길 열림 행사에 참가했다. 지난해 이른 봄에도 현행복 선생과 함께 이곳을 찾았었는데 둘이 담소를 나누며 추사의 자취를 더듬었던 기억이 새롭다.
봄꽃소식이 제주에서 시작돼 전국으로 북상하듯이 최근 올레에서 불붙은 걷기 열풍도 하나의 트랜드로서 전국에 퍼져나가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날 행사에도 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주최 측에서 나눠준 안내책자와 기념 스카프, 물병 하나를 들고 제1코스인 대정향교로 걸음을 옮겼다. 추사 관련 유적이 산재해 있어 그의 귀양살이 외로움과 추사체의 완성을 향한 편린(片鱗)을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정골에 가면 언제나 그렇듯이 단산이 먼저 눈에 다가온다. 제주의 다른 오름이 풍기는 오동포동한 느낌과는 전혀 다른 독특한 풍경이다. 대정향교로 가는 길에서 바라보면 마치 거인이 꿀맛 같은 오수를 즐기는 듯 하늘을 향해 입 벌려 드러누운 형상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대정골의 역사를 보면 평화로운 날들은 봄날처럼 짧았고, 거친 세파가 물굽이처럼 끊임없이 밀려왔음을 알 수 있다.
단산의 남쪽 기슭 양지바른 곳에 들어선 대정향교는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하지만 외양의 그럴듯한 모습과 달리 경내를 둘러보면 예스러움이 크게 탈색된 느낌을 준다. 문화재 복원사업으로 오히려 원형을 해치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이곳도 예외는 아니다. 대정향교의 협문은 다른 향교에 비해 더 낮다. 공자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으로 향할 때 모든 이들이 고개를 숙여 들어가라는 뜻이다. 향교를 찾는 이들이라면 그 정도는 알 터인데 강제로 고개를 숙이도록 지은 건축구조가 매우 권위주의적이다. 그 만큼 조선시대 유림은 서슬이 퍼랬다.
대정향교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東齋)에는 '의문당(疑問堂)'이라는 당호가 있었다. 추사가 유배생활 중 이곳에서 유생들을 가르칠 때 훈장 강사공의 부탁을 들어 써준 글이라고 한다. 지금 원판은 추사기념관에 전시되고 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세한도와 '의문당'의 당호야말로 추사가 제주는 물론 후세에 남긴 가장 소중한 보물이라고 여겨왔다.
사찰에 걸려 있는 목어(목탁, 魚鐸이라고도 함)가 수행자들이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는 뜻을 전하고 있듯이 '의문당' 역시 그런 깊은 의미를 간직하고 있다. 향교를 들락날락 하는 유생들에게 무엇 때문에 글을 배우며, 그것을 통해 무엇을 이루고자 함인지 추사는 늘 일깨우려 했던 것이다. 배움은 사물의 이치나 현상에 대한 끊임없는 의문과 호기심에서 비롯되듯이 보다 높은 차원의 학문이나 종교, 예술을 향한 구도(求道)도 바로 의문에서 시작됨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누구나 인생이라는 변화무쌍한 길을 걸어간다. 그러나 삶의 방향과 목적을 분명히 깨닫고 걸어가는 이는 많지 않다. 추사 역시 고관대작에서 하루아침에 유배 길에 오르며 엄청난 충격과 방황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홀로 외로운 섬에 갇혀 지낼 때 희망은 실낱 같고, 번민은 쉬임없이 그를 괴롭혔을 것이다. 그래서 '왜, 무엇 때문에 구차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하며 불면의 밤을 뒤척거렸음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추사는 마침내 새로운 길을 보게 되었고,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갔다. 겨울이 온 뒤 솔잎이 더 푸르러진다는 '세한도(歲寒圖)'가 사람들에게 감동으로 다가서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길을 묻고자 하는 이들에게 추사는 무엇을 가르쳐 줄 것인가. 어쩌면 추사는 대정향교에 걸었던 '의문당'을 가리킬지도 모른다. 그래서 의문은 스스로 삶의 길을 비추며 올바로 찾아가게 하는 '내비게이션'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