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유배인과 여인들]간옹 이익(李瀷)과 김만일의 딸(5)

[제주 유배인과 여인들]간옹 이익(李瀷)과 김만일의 딸(5)
학풍과 기개 제주후손들에게 이어져
  • 입력 : 2012. 02.06(월)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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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옹 이익의 제주 유배지. 현재 관덕정 북쪽 골목길에 표석을 세워놨다.

이익이 제주에 유배 중이던 1623년 3월 인조반정이 일어난다. 광해군이 선조의 계비(후비)인 인목대비를 폐위하고, 인목대비 어머니 노씨를 제주 관비로 유배 보내는 등 실정을 거듭했기 때문이다. 인조가 궁궐을 점령할 때 대장으로 나선 이가 이익을 동몽교관으로 발탁한 제주목사 출신 이괄이다. 반정이 성공하자 이익은 다른 유배인들과 마찬가지로 유배에서 풀려 사헌부 장령(정4품) 직에 제수되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그의 생명을 구해준 영의정 기자헌 역시 유배에서 풀려도 '불사이군'을 내세워 조정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제주시 오라동에 남아 있는 이익 부인 경주김씨의 묘. 사진은 원형이 바뀌기 전의 모습으로 지금은 화려한 비석과 구조물로 장식돼 있다.

이후 조정에선 김류와 이귀 등 공신이 권세를 잡고, 반정 대장을 맡았던 이괄은 평안병사 겸 부원수로 밀려난다.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있던 이괄은 의금부도사가 모반을 꾀한 혐의로 아들을 잡으러 오자 반란을 일으켜 1624년 1월 한양으로 쳐들어온다.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지방 반란군에게 수도를 뺏긴 이괄의 난이다. 결국 인조는 도성을 버리고 대신들과 함께 남쪽으로 피난을 가는데 이익은 행재소(임금이 궁을 떠나 잠시 머무는 곳)에 늦게 나타났다는 이유로 삭탈관직된다.

불운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아 1624년 4월 충주 고향집에 머물던 이익은 말발굽에 치어 마흔 여섯 살의 나이로 사망한다. 4년 6개월 동안의 유배에서 풀려 돌아간 지 11개월 만의 일이다. 당시 경주김씨와 제주에서 낳은 아들 인제는 제주에 살고 있었다. 인제가 네 살밖에 되지 않아 경주김씨와 인제는 이익이 정착한 후일 상경을 기약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다른 유배인들 역시 유배지에서 생긴 가족은 보통 유배가 풀리고 나서 1년 혹은 3~4년 정도 지나서 데려갔다.

▲북헌 김춘택이 지은 이익 손자 이윤의 묘비. 당시 조선의 묘비에는 명나라 속국이라는 뜻의 '유명조선국'을 새겨 넣었지만 '조선국'으로만 표기했다.

이익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인제는 형 인실과 교류하고, 무과에 급제해 서울에 올라가 훈련원 판관(종5품)까지 지내게 된다. 자식을 제주도에 잡아두지 않은 어머니의 용단과 그 영향력은 오래도록 이어져 한말 의병장 최익현도 제주 유배 때 이익 후손 이기온과 깊은 인연을 맺는다. 감목관이라는 친정의 명성과 경제적 부, 남편이 가졌던 중앙정계에서의 입지와 명예, 남편이 유배 중 가르친 총명한 제자들의 영향력을 모두 아우르는 처신을 아들을 위해 슬기롭게 구사한 덕분이다.

이익 집안은 임진왜란 이후 명가로 자리 잡아 이익과 장남 인실의 묘갈명(묘비명)은 각각 영의정 최석정과 우의정 윤증이 지어준다. 숙종 임금의 손위 처남 김진구도 이후 제주에 유배 왔을 때 이익 손자 이윤과 벗으로 사귀어 가깝게 지낸다. 이윤의 아들 중발과 중성 형제는 김진구 밑에서 유학을 공부했으며, 중발은 김진구의 아들 김춘택과 교분을 맺기도 한다. 이윤이 죽자 중발은 뛰어난 문장가였던 김춘택에게 부친의 비명을 지어달라고 청한다. 현재 서귀포시 효돈동 월라봉 정상에는 김춘택이 지어준 묘비가 남아 있다.

이윤에 관한 내용은 김춘택의 '북헌집'에도 기록돼 있다. "이군의 이름은 윤이다. 즉 고(故) 장령인 익(瀷)의 후손이다. 장령은 광해군 때 절개를 세워 제주에 유배되어 살았다고 한다. 윤은 무과 출신이나 실은 돌아가신 아버지와는 같은 나이인데 주교로서 천총을 역임하고 별장이 되었다. 이씨가 우리에게 집안끼리 정들게 한 것은 돌아가신 아버지(김진구)가 유배를 오면서 시작되었는데 윤은 모든 정성을 다하였다. 그 아들이 중발인데 중발은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배워 유생들 가운데서 이름이 났다."

이처럼 이익이 제주에 학풍을 진작시키고 그 후손들이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인사들과 교유하면서 학맥을 이어가게 된 것 역시 남편이 없는 상황에서 자식을 혼자 양육한 경주김씨를 빼놓곤 설명할 수 없다. 이익의 후광도 있었지만 그가 숨진 후에도 인제가 어느 정도 자라자 서울로 보내 전 부인의 자식인 인실과의 연결고리를 튼실하게 한 경주김씨의 원대한 포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익이 숨지고 42년 후인 1666년 사망하기까지 제주목 산지에 살았던 이 여인의 지혜와 기개는 제주 선비들에게 간옹의 이름을 면면히 기억하게 했다. 그러나 이익 문집과 이익 본가의 족보에는 김만일의 딸 경주김씨에 대한 기록이 올라 있지만 제주도의 경주김씨 족보에는 이익에 관한 기록이 없다. 현재 제주시 오라동에 남아 있는 경주김씨의 묘소에서 그 자취를 어렴풋이나마 더듬어볼 수 있다.

<표성준기자 ·김순이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김익수 국사편찬위 사료조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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