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유배인과 여인들]김춘택과 석례(2)

[제주 유배인과 여인들]김춘택과 석례(2)
"장다리는 한철이요, 미나리는 사철이라"
  • 입력 : 2012. 04.30(월) 00:00
  • /표성준기자 sjpyo@ihalla.com
  • 글자크기
  • 글자크기

▲가야금 타는 기녀. 신윤복의 '연당야유' 중 일부.

목에 칼차고 좁은 수레에 몸실어 유배길
비녀 꽂은 초로의 기녀 적거지 찾아와

▲김만중이 한글로 쓰고 김춘택이 한문으로 번역한 사씨남정기.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발췌.

명문가의 자제였던 김춘택은 당쟁의 소용돌이에서 맴돌아 과거에 응시하거나 관직에 나아간 적이 없다. 그러나 탁월한 시문과 문장으로 당대를 풍미했고 자부심 또한 대단했다. 그는 작은할아버지 서포(西浦) 김만중(1637~1692)의 한글소설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를 사대부들에게 읽히기 위해 한문으로 번역했다. 악한 첩에게 쫓겨났던 착한 처가 결국 집으로 돌아온다는 내용의 이 소설은 노래로 만들어져 세간에 떠돌았다.

"장다리는 한철이요, 미나리는 사철이다." 무·배추의 꽃줄기를 말하는 장다리는 장희빈을, 미나리는 인현왕후를 상징한다. 이 노래는 미복을 하고 은밀하게 궐 밖에 나가 민심을 살피던 숙종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 결국 노래가 암시하듯 장희빈은 후궁으로 강등되고, 폐출됐던 인현왕후는 복위된다. 이 '미나리요'는 작자 미상으로 전해지지만 서인 중심 세력인 김춘택이 남인에 대항해 인현왕후 복위 운동을 벌이거나 뛰어난 글솜씨로 노래를 지은 전후 이력에 비춰보면 그의 작품일 가능성이 높다.

그는 김만중의 아낌을 많이 받았다. 진사에 장원급제한 수재였던 김만중은 김춘택이 어릴 때부터 문학적 재능을 알아보고 슬하에 두어 이끌고 가르쳤다. 이러한 가학(家學)을 통해 김춘택이 상당한 수준의 학문적 경지에 이르렀음은 물론이다. 김만중의 '국문가사 예찬론'인 "우리말을 버리고 다른 나라의 말을 통해 시문을 짓는다면 이는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에도 상당 부분 공감했던 것으로 보인다. 후일 유배지인 제주에서 '별사미인곡'을 한글로 짓게 된 밑바탕에는 김만중의 영향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김춘택의 시문에 나타나는 인간적인 정감의 소탈한 토로와 행동 역시 김만중의 영향으로 보인다.

그는 서포의 한글소설 '사씨남정기'의 한문번역에 이어 송강 정철의 후손으로부터 '장진주사(將進酒辭)'의 한문번역을 부탁받아 해냈다. 제주에서 6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면서 지은 시문도 많이 전해지고 있다. 그중에서 한글로 지은 '별사미인곡(別思美人曲)'과 이 노래를 짓고 널리 퍼지게 하는 데 정성을 다한 석례(石禮)라는 여인에게 주목해야 한다.

김춘택이 제주에 유배 왔을 때는 1706년 9월(숙종 32년) 그의 나이 37세였다. 앞날을 암시라도 하듯 전남 해남에서 출발해 제주에 도착하기까지 유배길도 순탄치 않았다. "나는 이미 병이 심한데다 밤낮으로 빨리 달려오느라 칼(枷·죄인에게 씌우던 형틀)로 목에 상처가 났고, 또한 수레가 좁고 흔들거려 팔다리가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죄인이 목에 칼을 차고 끌려가는 모습을 보기 위해 읍촌에 사는 남녀노소는 물론 나그네까지 몰려들었다. "전에 내가 그런 상복(喪服) 채로 유배 가는 것을 보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큰 죄를 지었더라고. 이제 정말 죽을 거야." 구경하던 한 노파의 호들갑이 아니어도 죽음을 기다리던 그의 정신은 이미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 있었다. 그는 훗날 '피체록(被逮錄·체포된 기록)'에서 부끄럽고 쓰라렸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제주에서 처음 머문 곳은 동문 근처에 있는 기녀 오진(吳眞)의 집이었다. 다음 해에는 산지에 있는 이윤(李火允)의 집으로 옮겼다가 다시 남문의 청풍대 근처로 이사했다. 다행히 유배를 떠나오면서 노복들을 데리고 왔으며 수시로 동생들이 찾아와 함께 지냈다. 심지어 부인 완산 이씨까지 와서 지내다 갈 정도였다. '별사미인곡'은 마지막 거처였던 제주성 남쪽의 집에서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남성 안에 집을 옮기고(移去南城漫賦)'라는 시가 그의 문집 '북헌집(北軒集)'에 실려 있다.

"적거를 두세 번 옮겨 다니며/ 변방마을 가는 곳마다 시를 읊네/ 한가히 마주하는 마당 앞 고목/ 성 위 높은 누각에선 한 눈에 내려다보이네/ 다만 곤궁하여 자취가 안정되지 않아/ 이미 위난을 넘겼으니 안심이 되네/ 동쪽 이웃의 기생 하나 때때로 방문하는데/ 백발이 성성하여 대비녀(竹簪)를 꽂고 있네."

이 시는 제주성 남문 청풍대 누각에 올라 큰 팽나무 고목이 마당에 그늘을 드리운, 자기가 사는 집을 내려다보는 심정을 읊었다. 시에 등장하는 때때로 찾아오는 기녀는 요염한 젊은 기녀가 아니라 이미 머리가 희끗희끗 세어가는 초로의 여인이다. 머리에 대나무 비녀(竹簪)를 꽂은 모습으로 보아 화사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런데 어찌하여 김춘택은 이 기녀로 하여금 자기를 때때로 찾아오게 했을까?

/특별취재팀=표성준기자·김순이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김익수 국사편찬위 사료조사위원·백종진 제주문화원 문화기획부장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4686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