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유배인과 여인들]박영효와 과수원댁(4)

[제주 유배인과 여인들]박영효와 과수원댁(4)
제주에 개화의 씨앗을 뿌리다
  • 입력 : 2012. 08.06(월) 00:00
  • 표성준 기자 sjpyo@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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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효는 제주 유배 중 중등교육기관인 의신학교와 제주도 최초의 여학교인 신성여학교, 제주도 최초의 교회인 성내교회가 예배당을 마련할 때에도 도움을 준다. 사진은 성내교회 예배당으로 사용된 옛 출신청 건물.

독짓골에 과수원 조성 후 작물 보급
의신학교·신성여학교 등 설립 기여

박영효는 독짓골이라 불리던 제주성 남쪽 구남동 일대에 넓은 땅을 매입해 집을 마련하고 과수원을 일구어 나갔다. 그리고 도저히 유배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집사며 노비를 많이 거느리고 살았다. 제주사람들은 훗날 박영효가 떠난 뒤에도 오랫동안 이 과수원을 '박판서 과수원'이라고 불렀지만 지금은 아파트단지가 들어서 그 원형을 확인할 수 없다.

조천 김희주 집에 잠시 거주할 때도 우영팟(집 주위에 있는 작은 텃밭)에 고추와 수박, 호박 등을 심으며 소일했던 그는 이곳에서 과수와 함께 원예작물을 시험재배했다. 온난하고 강수량이 많은 제주도의 기후풍토를 고려해 일반 작물 대신 특수작물을 선택한 것은 일본 망명생활 중 원예기술을 습득할 만큼 혜안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그는 여러 종류의 감귤을 비롯해 감, 배, 비파, 석류 등 과수와 함께 고구마와 감자, 양배추, 양파, 토마토, 무, 당근 등 특수작물을 심어 재배했다.

그는 재배에 성공한 작물을 제주도민들에게 권장해 심도록 했다. 박영효는 귀족이었지만 농민과 머슴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친절을 베풀었으며, 동리 사람들과는 바둑을 두거나 산지포에 나가 낚시를 하면서 어울려 서민적인 풍모를 드러냈다. 과수원에서 생산되는 과수나 야채도 이웃에 나눠줘 명성이 자자했다. 그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던 주민들은 그를 따라 작물을 재배하기 시작했으며, 제주도의 식생활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때 보급된 작물은 지금까지도 대표적인 작물로 제주도 전역에서 널리 재배되고 있다. 중앙에서 개화파 거두로 활동했던 박영효는 그렇게 제주에 개화의 씨앗을 뿌리기 시작했다.

일본 망명 당시 유학생들의 교육을 위해 친린의숙을 설립했던 박영효는 제주에서도 교육에 뜻을 두고 학교 설립을 적극 지원한다. 1906년 2월 일제가 통감부를 설치해 한반도 침략을 노골화하자 전국적으로 교육 구국을 목적으로 사학 건립 운동이 전개된다. 제주지역에서도 제주군민의 민족운동적 계몽과 교육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제주군수 윤원구를 주축으로 의연금을 모아 제주 최초의 중등교육기관인 의신학교를 설립한다. 이때 박영효도 의연금 100원을 지원하고, 이어 1909년 개교한 제주도 최초의 여학교인 신성여학교 설립에도 도움을 준다.

그는 또 개신교 목사로는 처음 제주에 파견된 조선예수교 장로회 소속 이기풍 목사가 성내교회를 설립할 때에도 100원을 헌금한다. 그의 도움으로 이기풍은 1910년 관덕정 서쪽에 있던 옛 훈련청(訓練廳·병사 훈련과 무예를 수련하던 곳) 자리인 출신청(出身廳·조선시대 무과에 급제한 사람들이 근무하던 관아) 건물을 사들여 예배당을 마련했다. 당시 제주도는 1901년 발생한 신축교난(이재수란)의 여파가 채 가시지 않아 외국인과 외국 종교에 대한 주민들의 반감이 거셌다. 이기풍은 이런 와중에 한성순보에 제주도 풍속을 소개하는 글을 실어 주민들을 자극한다. 제주도에 온 지 6개월이 지나 약속대로 제주도의 진기한 풍속 대여섯 가지를 적어 평양으로 보내 그것이 한성신문에 실렸는데 곤욕을 겪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1909년 5월 5일, 문밖을 나섰던 박영효가 사람들이 모여 웅성웅성하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 가까이 갔다. 그곳에는 '제주도를 악선전한 이기풍이란 놈을 5월 5일을 기하여 때려 죽인다'는 방이 붙어 있었다. 험악한 분위기를 눈치 챈 박영효가 서둘러 이기풍의 집을 향해 갔을 때 청년들이 금방이라도 돌을 내려칠 기세였다. 이기풍의 딸 이사례는 훗날 당시의 아찔했던 상황을 이렇게 진술했다.

"이 고얀 놈, 네 놈이 제주도 흉을 봤지? 그래 말똥으로 불을 때는 것이 무엇이 나빠. 쌀을 안 씻고 밥을 지으면 뭐가 나빠. 네 놈이 제주도 사람을 야만인 취급했겠다. 네 놈이 제주도 맛을 못봤구나." 청년들이 신문지 한 장을 쑥 내보였다. 이때 제주도에 유배되어 살고 있던 박영효 대감이 벽보를 보고 불길한 예감이 들어 뛰어왔다. 박영효는 이기풍을 청년들에게서 떼어놓은 뒤 설득하기 시작했다. "여보게 청년들! 이 무슨 추태인가? 제주도 풍속을 있는 그대로 소개하였을 뿐이지 않는가? 설령 나쁘다면 자네들이 앞장서서 고쳐야 하지 않는가! 이 분은 멀리서 이곳에 복음을 전하러 오신 목사님이셔!"(순교보. 이사례)

비록 유배 중이기는 했지만 그는 이미 도민들에게 존경받는 선비였다. 청년들은 손에 들고 있던 돌을 땅바닥에 내던지고 사라졌다.

/특별취재팀=표성준기자·김순이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김익수 국사편찬위 사료조사위원·백종진 제주문화원 문화기획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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