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철학자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우주의 질서에 대한 신비를 물질과 정신(Idea)세계에서 분석했을 때 우연히 이뤄졌다고 보지 않았다. 절대자인 누군가의 영향에 의해 만들어진 자연의 창조물로 일정한 법칙과 질서가 시각(Visual)과 미학(Aesthetic)적 가치관 속에 있다고 믿는 것이 자연을 이해하는데 쉬웠을 것이다.
서양은 그리스의 철학자들을 중심으로 우주의 질서가 일정한 자연의 법칙 속에 있다고 믿어왔다. 따라서 절대주의적 가치관과 미의 정신적 세계에 대해 일정한 법칙과 사상을 철학과 수학을 통해 이념화하려고 노력했다. 절대주의적 가치관과 일정한 질서의 법칙이 만물의 근원 속에 있다고 생각해 왔던 그리스의 철학자 피타고라스(Pythag oras, BC 570~490)가 대표적이다. 그는 자연 질서의 원리를 자연수(自然數)에 의해 성립될 수 있다는 법칙을 발표함으로서 추상적인 미의 개념을 정량적으로 설명하는 근간을 세웠으나 미의 개념을 자연수로 증명하는데는 한계를 느꼈고 결국 그의 철학은 이념으로 그치고 말았다.
자연수(自然數)만을 인정하던 그 당시의 배경 속에서 아무리 나눠도 떨어지지 않는 여운(餘韻)의 수(數)인 무리수(無理數)의 개념을 모르는 상태에서 무리수로 미의 질서를 설명 하려는 그 자체가 무리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 뒤로도 많은 이들이 자연의 법칙 속에 미의 기준을 수와 비례로서 발견하려고 노력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피보나치는 일정한 비율 속에 미의 질서가 존재한다고 보고 이를 황금비(Golden ratio)라고 정의했으며 건축, 미술, 환경, 의학 등 우리 주변에서 많이 적용되면서 현대 미학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황금비에 대해선 대다수 잘 알고 있으면서 황금비의 원리가 자연수가 아닌 무리수라는 점을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레오나르도의 황금비(1:1.617647...) 등 모든 수가 영원히 떨어지지 않는 무리수로 이뤄져 있으며 이것들이 아름다운 황금비인 것이다.
제주도 민요 후렴 속에는 시집살이, 생활고에 대한 한(恨)이 담겨있다.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고 소리로라도 마음을 달래려던 모습이 보인다. 현실에서 풀지 못하는 한을 후렴에서 넋두리로 달래듯 부르는 소리, 이것이 제주의 노동요(勞動謠)의 특징이다.
제주의 신화나 전설에도 안타까운 설화들이 많다. 설문대할망의 속옷을 만드는데 백 필에서 한 필이 부족해서 육지와 연결하지 못했다는 이야기, 가마솥에 빠져 죽은 오백 장군 이야기 등 완벽하지 못하고 약간 부족한 여운의 얘기들이 제주마을마다 설화와 소리에 깃들여 있다. 그래서 우리 민족 마음 속엔 맵고 끊지 못하는 여운의 정(情)이 남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여운의 정이 아마도 영원히 나누어질 수 없는 무리수가 아닐까 생각한다.
한국인의 특징인 덤의 문화가 수(數)의 개념으로 보면 정량화 되지 않은 무리수이지만 자연적인 맛이 남아있는 여윤의 수라고 말하고 싶다. 한(恨)의 삶, 여운(餘韻)들이 깃들여 있는 제주의 역사와 신화를 슬픔의 과거사로만 보지 말고 여운이 담아 있는 예술의 극치로서 재발견한다면 제주의 문화와 역사는 새로운 가치로서 재탄생될 것이다.
피타고라스가 발견하지 못한 무리수의 세계가 탐라 문화 속에 있다면 과거의 역사는 결코 슬픔의 과거사가 아니라 제주의 문화를 더 한층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으며 이러한 가치는 제주의 미래를 이끌어 갈 후손들에게 훌륭한 무형문화재를 남겨 줄 수 있는 유산으로 남을 것이다.
<김영환 제주관광대학교 디자인경영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