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당굿 기록](7)칠머리당영등굿 송별대제일

[제주당굿 기록](7)칠머리당영등굿 송별대제일
"영등할망신이 궂은일 다 막아주고, 씨 골고루 뿌려줍써"
  • 입력 : 2013. 03.28(목) 00:00
  • 김명선 기자 nonamewind@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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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2월 14일 제주시 칠머리당에서는 바람신인 영등할망신이 제주를 떠나기에 앞서 송별대제일을 개최하는데, 이날 산지어촌계 소속 잠수회원과 어부, 선박사업을 하고 있는 단골들이 정성스레 제물을 준비해 상을 차리고 심방을 통해 바다의 풍어와 풍농, 가내평안, 안전조업을 기원한다. 김명선기자

영등철 제주도 전역서 한바탕 굿판 벌어져
척박한 자연환경속 신 의지하며 삶 이어가


천혜의 자연경관을 가진 제주에서는 음력 2월이 되면 한바탕 굿판이 벌어진다. 음력 2월 1일에 바람신인 영등할망신이 제주시 한림읍 한수리로 들어와 보름날(15일)에는 우도를 통해 빠져나간다는 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이 시기 영등할망신은 바람을 일으키며 천지에 씨앗을 뿌리는데, 이 시기를 맞춰 바다의 평온과 바다에서의 많은 수확을 기원하기 위한 굿이 제주 전역에서 행해진다. 제주시 건입동 칠머리당에서 행해지는 영등굿은 사라져가는 무형문화를 지키려는 심방과 단골, 학자들의 노력에 의해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2009년 9월 30일)되기까지 했다.

▶칠머리당영등굿=중요무형문화재 제71호(1980년 11월 17일 지정)인 칠머리당영등굿. 칠머리당의 신은 도원사감찰(都元師監察) 지방관과 용왕 해신부인(龍王海神婦人)이다. 이 두 신은 부부로 도원사감찰 지방관은 마을사람의 출생·사망·호적 등 모든 일을 맡아 수호하고, 용왕 해신부인은 어부·해녀를 맡아 생업을 수호한다. 이 외에도 남당하루방, 남당할망, 영등대왕, 해신선왕이 있다. 이 당의 신화인 본풀이에 따르면 도원사감찰 지방관은 하늘을 아버지로, 땅을 어머니로 하여 강남천자국(江南天子國)에서 솟아난 천하명장이다. 남북 적이 성하여 국가가 어지러울 때 백만대병을 거느려 난을 평정한 후, 용왕국에 들어가 용왕 해신부인과 결혼하고 제주로 들어와 이 당의 신으로 좌정했다고 한다. 이 당에서는 음력 2월 14일 영등할망신이 제주를 떠나기에 앞서 풍어와 바다의 평온, 가족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칠머리당영등굿송별대제가 집전된다.

▶"다 막아주고, 씨 골고루 뿌려줍써"=칠머리당의 주인은 당이 위치한 주변의 바다와 농토를 터전으로 살아가는 이들이다. 당을 찾는 이들을 단골이라고 부르는데 칠머리당에는 산지어촌계 소속 어부와 해녀, 선박업자 등이 찾는다. 어부와 선박업자 대부분이 남성인 반면 당에는 여자들만 온다. 이들은 제물을 차려 신에게 올린 뒤 심방을 통해 풍어와 풍농, 가내평안을 기원한다. 최근에는 건입동주민센터 소속 공무원들도 단골로 참여하고 있다.

시어머니를 이어 27년째 칠머리당의 단골인 이경희(54·여)씨. 시아버지가 1척의 배로 시작했던 모래 굴취사업이 이제는 4척에, 직원은 90여명이나 되는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아버지의 대를 이어 사업을 물려받은 아들과 결혼한 이씨는 매년 칠머당을 찾아 선박의 무사고와 무사운행을 기원하고 있다. 이씨의 손을 잡고 함께 당을 다녔던 시어머니는 연로하신 탓에 잠시 당을 찾아 절을 올리고 돌아가신다.

이씨는 "처음에 당을 찾는 것이 무척 이나 어색했다. 하지만 시어머니와 다니면서 가족과 회사직원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정성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됐다"며 "이제는 심방의 몸짓과 염물소리가 우리의 심장소리와 비슷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칠머리당에서 큰심방들이 여기 단골뿐만 아니라 도민의 무사안녕을 기원해 주는 것이 더 없이 뿌듯하다"고 말했다.

산지바다 해녀인 양성자(70)씨. 우도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물질도 배우고 결혼도 했다. 36년전 남편을 따라 제주시에 정착한 양씨는 산지바다를 터전으로 2남3녀를 키워냈다.

양씨는 "산지바다는 수심이 깊고 조류가 강해 물질작업이 쉽지 않은 곳이다. 삶의 터전이 바다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을때는 데모도 해 보았다"며 "탑동해안이 매립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이어 제주항 외항 공사가 시작되면서 또다시 물질할 바다가 사라졌다. 이제는 매립이 이뤄지지 않은 한 귀퉁이에서 소라 등을 채취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다른 산지바다 해녀인 고복심(63)씨. 13살부터 우도에서 물질을 시작한 고씨는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로 시집을 가면서 그곳에서도 해녀일을 했다. 남편이 제주항 항운노조원으로 취직하면서 37년전 산지바다에서 물질을 시작했다. 당시 남편은 36만원의 적립금을 내어야만 노조원이 될 수 있었는데, 산지해녀가 되기 위해서는 61만원을 내야했다. 고씨보다 1년 늦게 산지바다에서 물질을 시작한 양씨는 90만원을 주고서야 해녀일을 할 수가 있었단다. 그 당시 산지 해녀가 되기 위해서는 은퇴하는 해녀에게 돈을 지불해야만 잠수회원으로 등록이 가능했던 것이다.

고씨는 "당시 61만원이란 돈은 우리에게는 어마어마하게 큰 돈이었다. 그때는 돈을 주고 산지바다에 양식장을 구입한 느낌이었다"며 "한달에 날이 좋으면 20일 정도 물질을 할 수 있다. 해녀에게는 바다가 그 어떤곳보다 편안한 느낌을 주는데, 칠머리당을 찾는 것은 이런 평온을 계속 유지 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영등굿을 집전하는 심방의 입에서 "조심해라"라는 이야기가 나올때마다 단골들은 두손모아 기도하면서 "다 막아줍써"라고 기도한다. 현재 제주는 천혜의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다면서 관광객을 끌어모으고 있지만, 이곳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제주는 척박한 자연환경을 가진 섬일 뿐이다.

예전 제주 섬에서 살았던 선조들이 의지할 것은 신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연에 순응하며, 욕심없이 신이 뿌린 씨앗을 거둬들일때마다 고마워하는 마음을 가진 이들이 제주의 여성들이다.

[제주의 큰심방/김윤수칠머리당영등굿 보존회장]"단골없이는 심방도 없어…거짓말 경계해야"

김윤수(68) 칠머리당영등굿보존회 회장의 집안은 4대째 심방일을 해오고 있다. 제주 심방사회에서는 명문가 집안의 심방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할 것이다.

육지에서 '무당'이라고 부르는 무리를 제주에서는 '심방'이라고 한다. 심방들도 자신의 수양 정도에 따라 상·중·하로 나뉜다.

김 회장은 현재 제주에 몇 남아 있지 않은 큰심방이다.

16세가 되던 해에 병을 얻은 김 큰심방에게 큰어머니가 너는 "굿을 해야 살수있다"면서 자신을 따라 굿판을 다닐것을 권유했다. 그에게 처음 주어진 일은 집안의 보물이나 다름 없는 맹두를 들고 다니는 것이었다.

굿판을 다니면서 기적처럼 병이 말끔히 낫자 더욱 더 심방의 세계 빠졌던 김 큰심방에게 시련이 왔다. 정부에서 새마을운동 사업을 벌이면서 미신타파라는 미명하에 대대적으로 굿을 못하게 막은 것이다.

김 큰심방은 "굿을 하는 심방들이 무슨 죄를 지은 사람처럼 천대받은 느낌이었다. 21세가 되던 해에 굿에 대해 진절머리를 느낀나머지 서울로 무작정 상경했다"며 "친한 선배와 함께 생활하면서 매일 같이 술만 마셔됐다. 혈기가 왕성한 젊은때라 사회에 대한 반항심은 점점 깊어졌가고 있었는데, 10개월만에 다시 아파오기 시작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몸이 아파오자 다시 제주에 내려와 굿판을 다니기 시작했고, 3년간의 군생활을 마친 뒤 본격적인 심방일을 시작했다.

김 큰심방은 당시 제주에서는 굿을 제일 잘하기로 소문난 고 고군찬 심방의 양자로 들어갔고, 29세가 되던 해에 제주시 봉개동 강씨집에 처음으로 큰심방을 맏아 굿을 해온 것이 지금에 이르렀다.

1982년 칠머리당영굿 보존회 부회장에 선출되면서 제주 굿을 보존하기 위한 활동도 함께했다. 1990년에 칠머리당 메인 심방인 고 안사인 심방이 돌아가시자 뒤를 이어 칠머리당영등굿을 집전해오고 있다. 1996년에는 칠머리당영등굿 예능보유자로 지정됐다.

이후 제주를 넘어 칠머리당영등굿을 알리기 위한 노력이 계속이어지면서 2009년 9월30일에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에 이르렀다.

김 큰심방은 "심방일을 하면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거짓이 없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심방은 단골이 없으면 함께 사라지기 때문에 이들에게 거짓을 이야기 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며 "보존회 활동을 같이 하는 심방에게도 이를 강조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굿을 하는 것만으로도 핍박 받는 시절에 비하면 지금은 훨씬 나아졌다. 동료 심방들과 함께 제주 굿이 문화가치로써 얼마나 높은지 계속해서 알리는데 여생을 투자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명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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