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맞이 대청소를 했다. 청소란 게 그렇듯 주로 버릴 것을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가끔 한때 정을 주었던 오래된 것들이 빼꼼히 얼굴을 내민다. 그때마다 마음속에는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가득하다. 내가 주변의 것을 소홀히 하고 밖으로 정신없이 돌아다니고 있었구나 하는 반성과 함께….
개인적으로 좋은 사람 세 명을 만나면,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선배 1명, 친구 1명, 후배 1명이 그렇다. 선배에게는 인생경험을 배운다. 선생님이 그렇다. 한유(韓愈)는 '사설(師說)'에서 배울 수 있다면 나이, 장소에 상관없이 배우라고 했다. 그 이유는 '도(道)'를 간직한 존재가 바로 선생님이기 때문이었다. 지금이야 조금 허접해도 '선생'이라는 칭호를 붙이지만, 옛날 선생님은 그야말로 도를 후대에 전해주는 완벽한 인격체였다.
옛날 제주도, 굳이 기록을 들춰내지 않아도 참 살기 어려운 곳이었다. 조선시대 제주도를 최적의 유배지로 생각했던 것도 일리가 있다. 극과 극은 통했던가? 유배지에 왔던 사람들은 자신의 싹을 유배지에 심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시대 제주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귀양다리들에게 배운 사람들이었다. 조선시대 제주도의 선생님은 거의 대부분 본토에서 배를 타고 온 유교지식인이었다. 그런데 반대로 조선시대 제주 사람으로 외지인에게 '선생'이라는 칭호를 받은 사람이 있었을까? 있다. 부해(浮海) 안병택(安秉宅:1816-1936) 선생이 그렇다.
부해 안병택 선생은 제주도에서 부친상을 치르고 나서 1893년 장성으로 삶의 거처를 옮겼다. 그 때 마침 동학 난이 발생하여 모든 가산을 약탈당하고 만다. 이후 광주 광산구 장덕동에 살면서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학통을 고수하면서 후학을 키운 제주의 인물이었다. 기정진 선생의 돌아가신 후에는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뜻을 계승하였다. 지금도 전남 광주지역에서는 안병택 선생을 기정진-기우만 선생의 적전으로 생각하고 있다.
광주에서는 홍석희(洪錫熹), 조국현(曺國鉉)등이 그의 문하에서 배웠는데, 조국현인 경우 화순에서 제헌국회의원을 지낸 인물이었다. 당시 제주도에서도 그의 존재를 알고 바다를 건너 배움을 청했다. 그가 키운 제주의 인물로는 제주의 의병장 고사훈, 심재 김석익, 김균배, 양찬휴, 부백심, 현상희, 양성하, 김형식 등이 있다. 이들은 제주도 항일 운동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로 평가된다. 사라봉 근처에 있는 모충사, 조천에 있는 항일 기념관에는 항일운동을 했던 고사훈 등의 인물이 쉴 새 없이 거론된다. 아쉽지만 그 뿌리가 안병택 선생이었다는 점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이는 기우만 선생의 항일정신이 안병택 선생을 거쳐 제주도에 이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사실은 근래에 한학자 오문복 선생이 문집을 발간하고 번역하면서 차츰 밝혀지고 있다. 안병택 선생의 행적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근대에서 현대로 오면서 우리는 정말 대청소다운 대청소를 했다. 지난 100년의 변화는 그 이전 1000년의 세월을 뛰어 넘는 것이었다. 청소란 것이 분명 버릴 것을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주변에 있는 소중한 우리의 것도 함께 쓸어버린 것은 아닌지 돌아볼 때이다.
<김새미오 제주대 국어국문학과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