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톡톡튀는 논술학교](15)실전 모의고사-인문사회 논술 문제

[톡톡튀는 논술학교](15)실전 모의고사-인문사회 논술 문제
인간의 '마음' 어디까지 들여다 볼 수 있을까
  • 입력 : 2013. 10.22(화) 00: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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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과학 등 연구 성과 대비하며 감정·감각 문제 주목
마음-뇌는 하나인지, 별개인지 이해하는 능력 측정

*다음 제시문들을 읽고 논제에 답하시오.

(가)
감정의 전염은 동시에 많은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다. 영화관에서 관객들이 슬픈 장면을 보고 일제히 눈시울을 적시는 것과 같이 눈에 띄게 나타나기도 하고, 혹은 모임의 분위기가 점차 격앙되어 가는 경우와 같이 은밀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우리는 이 전염의 결과를 눈으로 감지할 수는 있지만 어떻게 감정이 퍼지는가에 대해서는 대부분 명확하게 알아차리지 못한다.

감정적 전염은 뇌의 '하위 경로(low road)'라고 부를 수 있다. 하위 경로는 우리의 의식 아래에서 눈 깜짝할 사이에 자동적으로 손쉽게 작동하는 회로를 말한다.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행위는 하위 경로를 통해 작동하는 거대한 신경망에 의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잘 생긴 사람에게 눈길이 가거나, 상대방의 말 속에 뭔가 가시가 있음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하위 경로 덕분이다.

반면 '상위 경로(high road)'는 신중하게 조직적으로 단계를 밟아 가면서 작동한다. 이것은 우리가 감지할 수 있다. 상위 경로는 우리의 내적인 삶을 어느 정도 통제한다. 잘생긴 사람에게 접근할 방법을 찾으려고 하거나 가시 돋친 말을 하는 사람에게 보기 좋게 대꾸하는 법을 찾아내고자 할 때 우리는 상위 경로를 이용한다.

하위 경로는 감정으로 얼룩져 있는 반면 상위 경로는 이성적이다. 하위 경로를 통해서는 가공되지 않은 감정이 오가고 상위 경로를 통해서는 꼼꼼한 이해가 오고 간다. 하위 경로는 다른 사람의 감정을 곧바로 느끼게 해 주고 상위 경로는 우리가 느끼는 감정에 대해 생각하게 해 준다. 보통 하위 경로와 상위 경로는 서로 맞물려 있는데, 우리의 사회적 삶은 이 두 가지 경로의 상호 작용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

감정은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조용히 옮아간다. 그것은 아무도 의식하지 못한다. 하위 경로는 신경 회로를 이용하는 반면, 상위 경로는 뇌의 전전두엽 피질로 외부의 지각을 전달한다. 이 두 경로는 매우 다른 속도로 정보를 기록한다. 하위 경로는 정확성이 떨어지지만 신속하다. 상위 경로는 느린 반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 조금 더 주의를 기울인다.

하위 경로가 이미 반응을 마친 상태에서 상위 경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반응의 결과를 최대한 그럴듯하게 만드는 것이다. 과학 추리 작가인 로버트 하인라인은 이를 두고 비꼬듯 말한 바 있다. "인간은 합리적 동물이 아니라 합리화하는 동물이다."

(나) "이것은 새로운 원리이자 발견이지, 위대한 발견이야."

그 신사는 말하였다.

"자, 내가 다시 한 번 시도해 보도록 하지. 방에 카펫을 깐다고 해 보자. 너희들 같으면 꽃 그림이 그려져 있는 카펫을 사용하겠느냐?"

이 신사분에게는 언제나 '아니요'가 정답이라는 것을 이제 대부분 알아차린지라, 아이들은 큰 목소리로 입을 모아 "아니요"라고 대답했다. 뒤떨어진 몇 명만 "예"라고 대답했는데, 그 중 한 명은 시시 주프였다.

"20번 여학생."

신사는 모든 걸 다 안다는 듯 차분한 미소를 지으며 시시를 불렀다. 시시는 얼굴을 붉히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너는 네 방에 꽃 그림이 그려진 카펫을 깔겠다는 거로구나.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지?"

"죄송하지만 어르신, 저는 꽃을 아주 좋아해요."

소녀는 답했다.

"그래, 너는 꽃을 좋아해서 그 위에 식탁도 의자도 올려놓고, 사람들이 무거운 신발을 신고 그 위를 걸어다니도록 놓아두겠느냐?"

"그것 때문에 꽃들이 다치지는 않으니까요, 어르신. 죄송하지만 어르신, 그 꽃들은 뭉개지거나 시들지도 않을 거에요. 그 꽃은 아주 예쁘고 보기 좋은 것을 그려 놓은 그림이니까요. 제가 상상하기에는……."

"이런, 이런, 이런, 하지만 너는 상상을 해서는 안 된다!"

신사는 자기가 그렇게나 말하고자 했던 결론을 꺼낼 수 있는 기회가 오자 기뻐서 소리를 질렀다.

"바로 그거야. 너는 절대로 상상을 해서는 안 되는 거야."

신사 곁에 서 있던 토마스 그래드그라인드 씨도 심각하게 말을 받았다.

"상상 같은 것을 해서는 안 되는 거란다, 시실리아 주프."

"사실, 사실, 사실만!"

신사는 소리쳤다.

"사실, 사실, 사실만!"하고 토마스 그래드그라인드 씨도 따라했다.

(다) 마음에 과학적으로 접근할 때는 몇 가지 기본적인 지침을 고려해야 한다. 이 글은 추리 소설이 아니므로 여기서 사용할 마음이나 마음 상태에 대해서 명확한 정의를 제시하겠다. 일원론적 관점에서 뇌와 마음은 나눌 수 없다. 마음 혹은 마음 상태는 자기 자각을 포함해서 감각 운동 이미지가 발생하는 전역적인 뇌기능 상태이다. 감각 운동 이미지는 행동을 일으키는 모든 감각 입력의 결합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등이 가렵다고 하자. 등은 볼 수 없는 곳에 있지만 가려움은 내부 이미지를 만들어서 복잡한 몸 안에서 어떤 위치를 알려 주고 취할 태도까지 알려 준다. '긁어라!' 이것이 감각 운동 이미지이다. 감각 운동 이미지의 발생은 단순한 입출력 반응이나 반사가 아니다. 동물이 현재 하고 있는 행위의 맥락 안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개가 한쪽 발을 든 상태에서 다른 발로 등을 긁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감각 운동 이미지가 발생하고 운동 직전의 전(前)운동이 공식화될 때의 맥락은 매우 중요하다.

뇌는 1.5리터짜리 회색 물질 이상이다. 뇌는 뚜렷한 전기 활동을 일으키는 하나의 살아 있는 존재이다. 이 활동은 신경 과학의 개척자 중의 한 사람인 찰스 세링턴의 말대로 '마법에 걸린 베틀'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뇌와 중추신경계라는 베틀에서 수없이 많은 북이 왔다 갔다 하면서 곧 사라지지만 늘 의미를 지니고 있는 무늬를 짜고 있는 것이다. 신경망의 넓은 맥락에서는 이 활동이 곧 마음이다. 마음은 뇌와 차원이 같다.

(라) 동심(童心 갓난아이의 마음)이란 진심(眞心 참된 마음)이다. 만약 동심을 그르다고 한다면 이는 진심을 그르다고 하는 것과 같다. 동심이란 거짓을 버린 순진함이며 최초의 순수한 본심(本心 근본이 되는 마음)이다. 만약 동심을 잃으면 이는 진심을 잃은 것이니, 진심을 잃으면 바로 참된 인간성을 잃은 것이다. 사람으로서 진실하지 않다면 그는 최초의 본심을 회복할 수 없.을 것이다.

갓난아이는 인생의 시작이고 동심은 마음의 시작이다. 마음의 시작을 어찌 잃어버릴 수 있겠는가? 하지만 사람들은 동심을 어찌 그리 빨리 잃고 마는 것인가? 바야흐로 아이가 자라기 시작하면 듣고 보는 식견(識見)이 눈과 귀로 들어와 그 마음에 주인으로 행세하며 동심을 상실하게 된다. 아이가 성장하게 되면 보고 들은 식견에 따라 도리(道理)가 생겨나게 되고 그러면서 동심을 상실하게 된다. 오랜 시간이 흐르면 도리와 식견은 나날이 더 쌓이게 되고 마침내는 동심을 완전히 잃어버릴 수 있다.

도리와 식견이 늘어나면서 동심을 잃게 되면 말하는 모든 것이 도리와 식견에 의한 것이지 동심에서 저절로 흘러나온 언어가 아니게 된다. 그런 언어가 비록 교묘하다 할지라도 말하는 자신의 참된 모습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거짓 인간이 거짓으로 말하고 거짓으로 일하고 거짓으로 문장을 쓴 것이 아니겠는가? 거짓된 언어를 가지고 거짓으로 기뻐하고 이야기하게 되면 세상은 거짓이 아닌 것이 없게 될 것이다.

(마)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그동안 의식이 없는 곳에서 의식을 찾아 왔다는 것이다. 우리는 의식을 그것이 있는 곳에서 찾아야 한다. 의식은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거나 만드는 무엇, 더 적절히 말하자면 우리가 획득하는 무엇이다. 의식은 소화 과정이 아니라 춤에 더 가깝다.

진정으로 과학적인 의식 연구란 의식을 신경계에서의 사건과 동일시하는 연구뿐이라고 믿는다면 이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환원주의의 단편이다. 그것은 우울증이 뇌의 병이라는 생각과 마찬가지이다. 한 가지 의미에서 그것은 분명 사실이다. 우울증에는 신경적 징후들이 있다. 약물 요법의 형태로 뇌에 직접 조치를 취하면 우울증에 영향을 줄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의미에서 그것은 분명 사실이 아니다. 신경 용어들만으로 사람들이 어째서 우울증에 걸리는지, 또는 이 사람이 지금 여기서 우울해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우울증은 실생활의 사건들을 마주하고 있는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며, 이런 개인사뿐만 아니라 인류의 계통적 발달사를 배경으로 해서 나타나기도 한다. 우울증이 뇌의 병이라는 독단은 제약 회사의 이익에 이바지한다. 뿐만 아니라 우울증 환자의 오명을 벗기는 데에도 이바지한다. 좋은 일이다. 하지만 분명히 틀렸다. 의식의 이해에서 앞으로 나아가려면 우리는 내부의 신경을 향해, 즉 세포 수준의 작은 구조에 초점을 맞추는 미시적 초점을 포기해야 한다. 의식은 환경에 접속되어 있는 완전한 사람이나 동물의 역동적인 삶에 자리를 잡고 있다. 사람이나 동물의 능동적인 삶에 대해 이러한 관점을 취할 때에만 뇌가 의식의 경험에 기여하는 바를 이해하기 시작할 수 있다.

인간의 경험은 세상 속에서 타인들과 어우러져 펼치는 한 편의 춤이다. 당신은 당신의 뇌가 아니다. 우리는 자신의 생각과 감각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지 않다. 의식의 현상은 삶 자체의 현상처럼 세계를 요구하는 역동적 과정이다. 우리는 이미 환경이라는 집 안에 있다. 우리는 우리 머리 밖에 있다.

(바) 인간은 대개 마음과 몸의 두 요소로 존재한다. 몸에 대해서는 물리학자와 의학자의 설이 있거니와, 마음은 과연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 인간은 백 년 안에 반드시 죽는 날이 있기 마련인데, 죽을 때에 마음과 몸이 동시에 없어지고 마는가, 아닌가? 아, 예로부터 지금까지 동서의 철학자와 과학자가 끊임없이 나타났는데도 무엇보다 가까운 내 자신 속에 있는 마음의 문제가 아직도 결론을 얻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과학자는 다만 뇌 속에 갖추어진 지혜로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혹은 추측하기도 하고 혹은 실험해 보기도 하는 데에 그친다. 무릇 우주 안의 사물의 이치는 무궁하고 우리들의 지혜는 유한하다. 유한한 지혜로 무궁한 이치를 밝히려 하면, 영원한 시간에 걸쳐 생존하는 모든 사람들을 동원하여 이 일에 전문적으로 종사시켜도 결코 끝장을 보기에는 부족할 것이다.

이치의 극히 복잡하고 미묘한 것은 사고나 비교의 힘으로는 파악되지 않는다. 하물며 마음은 지혜보다 그 위에 위치하여 지혜를 명령하고 좌우하는 존재이니, 명령을 받는 지혜를 가지고 어찌 월권하여 도리어 그 마음을 구명한다는 것인가. 그러므로 마음은 처음부터 지혜로 구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 따로 마음 위에 존재하여 이 마음을 해명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도 아니므로, 부득불 그 마음의 본체를 고요히 길러 스스로 자체를 밝힐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언어와 사고를 버려서 단번에 일체의 인연을 끊고 이 일대사공안(公案, 귀중한 문제)을 마지막까지 추궁하여 하루아침에 활연히 깨닫고 보면 마음 전체의 큰 작용이 밝혀지지 않음이 없고 근본적인 심리 문제가 이에 있어서 얼음이 녹듯 풀릴 것이다.



<논제 1>제시문 (가)의 관점에서 제시문 (나)에 등장하는 '소녀'와 '신사'의 입장을 평가하시오. (800자 내외)

<논제 2>제시문 (다)와 제시문 (라)의 인간관을 요약하고, 그 둘을 제시문 (마)의 관점에서 비판하시오. (800자 내외)

<논제 3>제시문 (다), (라), (마), (바)에 공통된 주제어를 찾고 이를 바탕으로 제시문 (다), (라), (마), (바)를 비교하고 제시문 (마)의 관점에서 제시문 (다), (라)를 평가하시오. (1200자 내외)



*해설은 10월 29일자에 게재됩니다. <제주도논술면접교육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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