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시작하며]홍윤애를 아십니까?

[하루를 시작하며]홍윤애를 아십니까?
  • 입력 : 2013. 10.23(수)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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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개월 전 '제주 유배인과 여인들'이란 책을 읽고 홍윤애 이야기에 크게 감동 받았다. 당시 유배인이었던 조정철과 제주여인인 홍윤애와의 처절한 사랑이야기였다.

그 얼마 후인 지난 6월 23일 '의녀 홍윤애 추모 문학제'가 애월읍 유수암리 홍윤애 묘소에서 제주문인협회 주관으로 열렸다. 이날은 홍윤애가 비명에 간 지 232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그날의 슬픔을 나타내려는 듯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가운데 홍윤애에 대한 소개, 제례 봉행, 추모시 낭송, 참석자 헌화 및 분향의 순으로 진지하게 진행됐다.

홍윤애는 제주에 유배 온 조정철을 사랑한 여인이었다. 그녀가 사랑한 조정철은 관리도 아니요, 양반이나 선비도 아니었다. 그는 임금을 시해하려는 음모에 연루된 대역죄인이었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하나뿐인 생명을 기꺼이 바쳤다. 권력이 쳐 놓은 덫으로부터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내기 위해 거짓 자백을 거부했기에 고문을 받아 억울하게 죽었다. 그날이 바로 정조 5년(1781) 5월 15일(음력)이었다.

정조 1년 8월, 정조 임금을 시해하고 은전군 이찬을 추대하려던 역모사건이 발각되자 조정은 발칵 뒤집혔고, 주동자와 연루자들이 줄줄이 잡혀들었다. 역모 사건이 들통 나고 주동자 중의 한사람이 조정철의 장인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당시 27세로 탄탄대로를 걷던 그는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신세가 돼버렸다. 그렇지만 조정철은 겨우 살아남아서 절해고도인 제주 귀양길에 올랐다. 제주에서의 적소는 고을 아전 신호의 집으로 정해졌다. 이때 이웃에 살던 스무 살 아가씨가 홍윤애였다. 여러 해가 지나면서 홍윤애는 그의 조용하고 신중한 처신과, 항상 방안에 틀어박혀 책을 읽거나 시를 짓는 선비 중의 선비라는 걸 알게 됐다. 그의 처지가 궁지에 몰렸다는 걸 알게 된 홍윤애는 용기를 내어 집주인인 김윤재의 아낙을 찾아가 그분을 돌봐드리겠다고 자청했다. 그녀는 바느질삯을 알뜰히 모아 조정철의 식사와 의복을 수발하는 데 남모르는 정성을 기울였다. 이들은 서로 정이 들고 사랑하게 되면서 행동에 무척이나 조심했다.

마침내 당파가 서로 달라 오랜 견원지간인 김시구가 정조 5년 3월 제주목사로 부임해 왔다. 내려오자마자 그는 제주목사에게만 있고 다른 수령들에게 없는 선참후계권을 이용해 판관과 짜고 조정철을 제거하고자 했다. 그래서 조정철을 법정에 끌고 와 심한 매를 쳐서 거의 사체가 된 상태로 내쳤는데, 초주검의 조정철을 홍윤애가 입에 오줌을 부어 놓아 소생시켰다. 이에 분개한 김시구는 그녀를 관가로 끌고가서 장살해 동헌의 대들보에 매달아 죽여 버렸다. 관가에 끌려가기 전, 두 달 박이 어린 딸은 미리 언니한테 맡겨서 한라산 속 절로 떠나보냈다고 한다.

홍윤애의 죽음으로 인해 목숨을 건진 조정철은 29년의 오랜 유배생활을 끝내고 관직에 등용되자 순조 11년(1811) 제주목사 겸 전라도방어사를 자원하여 부임, 곧바로 생명의 은인인 홍윤애의 무덤을 찾았다. 목사의 신분인 사대부가 한 여인의 무덤에 찾아가 통곡을 하고 추모시를 써서 비석을 세웠던 것이다. 이후 조정철은 재임기간 중 받은 봉급 전부를 털어서 홍윤애와의 사이에 낳은 딸을 위해서 사용했다. 집도 지어주고 밭도 사주어 아비로서의 정을 아낌없이 듬뿍 주었다.

이 이야기는 단지 한 여인의 순애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제주여성의 내면에 잠재된, 권력에 굴하지 않는 정의로운 기질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홍윤애의 고결한 정신과 순정어린 사랑은 제주여성의 훌륭한 본보기가 될 뿐만 아니라 제주여성사에 빛나는 금자탑으로 각광받아 마땅할 것이다.

<성대림 서귀포의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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