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논단]탐라 장두 양제해 200주년 추모제를 기다리며

[월요논단]탐라 장두 양제해 200주년 추모제를 기다리며
  • 입력 : 2013. 11.25(월)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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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200년 전, 1813년 음력 11월 1일. 그날은 2013년 계사년 12월 3일(음력 11월 1일)이다. 이날은 의로운 제주 걸머리(아라2동) 어른, 양제해 선생님이 곤장에 맞아 돌아가신 사무치게 칭원한 날이다. 역사가 돼버린 사건이지만 오늘은 탐라의 장두 양제해 어른의 죽음을 해원해 드리려 한다.

그때는 '상찬계(相贊契)'라는 향리, 향임 등 제주도내 향권을 좌우했던 관리들이 '같은 부류의 사람들끼리 모여서 서로 찬조한다'는 의미로 만든 계조직이 있었다. 이들은 세 부류의 이속집단(鎭撫吏, 鄕吏, 假吏) 300명을 묶어서 하나는 마음으로 또 하나는 힘으로 서로 더불어 찬조하기로 하고 상찬계를 조직했다. 그로부터 슬픈 역사가 된 이야기는 양제해 모반사건, 양제해가 도주(島主) "제주도의 주인이 되려한다", 별국(別國)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 한다"는 별국창설설이 창궐했던 시절이었다. 결국은 양제해 모반 사건으로 몰고 가 양제해를 체포해 심문하는 과정에서 곤장을 심하게 때려 옥사케 한 참으로 참담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이 있었던 날은 10월 그믐. 중면의 여러 마을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 그에게 "간악한 향리들로 인한 민폐가 갈수록 심해져 사람들이 다 죽게 되었수다. 지금 풍헌 어른이 방장이 되었고, 사또께서도 향리들을 똑똑히 규찰한다고 하니, 어르신께서 결정을 내려 주십서"라고 했다. 양제해는 "글을 잘 짓는 사람을 구해서 등장(等狀) 초안을 가져오면 내가 탐라민인을 위해 한번 죽겠소"라고 답했다. 이 사실을 알아챈 윤광종은 먼저 김재검에게 가서 양제해 등이 변란을 도모한다 보고했다. 김재검은 상찬계의 칼자루를 쥔 핵심인물로서 이 보고를 듣고 양제해가 주도하던 등소 계획을 변란을 도모한 사건으로 부풀려서 제주목사에게 보고했다. 김재검 등은 야초대(夜招隊)와 800여명의 향리들을 총동원해 변란 사실을 밤늦게 목사에게 알렸고, 목사는 포졸들을 양제해의 집으로 출동시켜 양제해를 제주목 관아로 포박해 왔다. 상찬계 소속인 향리들이 자신들의 비리 사실이 드러날 것을 염려해 더욱 심하게 곤장을 내려쳤다. '상찬계시말'에서는 이러한 양제해의 죽음을 '상찬계가 입을 막아버린' 의도적 타살이라고 규정했다. 제주 사람은 양제해를 도민들을 대신해 죽은 인물, "금세의 항우"라고 했고, 하루에 세 번 한라산을 돌고, 매번 한라산 정상에 오를 때마다 몰래 팔진의 법을 익혔다 했다. 결국 제주 민인들에게 양제해는 장두였다. 이강회도 "양제해는 자신이 죽고 가족은 망함으로써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푼 자"라 했다.

이강회는 상찬계의 비리를 "백성들의 살갗이 다 벗겨지고, 살이 다 발라지고, 피가 다 마르고, 뼈가 다 부수어진다"고 하여 이를 사진(四盡)이라 했다. 결국 양제해란은 변란 반란이 아니라 폐단에서 구한다는 명분을 강하게 내세운 민란 또는 향전의 성격을 갖는 것이었으며, 상찬계와 양제해 등의 싸움은 향권을 둘러싼 집권세력과 실권세력 간 향전의 성격이 매우 강했다. 또한 제주지역 내에서 정치 사회 경제적 폐단을 일삼고 있던 상찬계를 타파하기 위한 등소운동이었으며, 더 나아가 상찬계와 결탁한 제주목사의 통치에 대한 부정이 결합됐다는 점에서 민란의 성격도 강하게 띠고 있다.

아, 1813년 11월 1일 세상을 떠난 영혼이시어. 칭원하고 원통한 영혼이시여. 이제라도 편히 저승 상마을에 가 나비로 환생하시옵소서. <문무병 민속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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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1 개)
이         름 이   메   일
8332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
oys1671 2013.11.25 (09:00:50)삭제
본문 내용중 이강회는 어떤 분이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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