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해송림, 제주숲을 살리자](3)일제강점기 제주 조림사

[잃어버린 해송림, 제주숲을 살리자](3)일제강점기 제주 조림사
1922년부터 광복전까지 5078ha에 대단위 조림
  • 입력 : 2014. 02.06(목) 00:00
  • 강시영기자 sykang@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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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1930년대 한라산에 심은 삼나무 조림지. 수령이 80년이 넘은 것으로 남원읍 한남리 소재 국립산림과학원 난대아열대산림연구소 관할 시험림에 일부가 남아 있다. 강경민기자 photo6n6@ihalla.com

일제, 벌채 그루터기 갱신·무입목지 대상 조림사업 전개
'更新臺帳'문서 확인… 식민지 산림정책·조림사 한눈에
수탈임정으로 황폐화 지속되자 산림자원 개척·벌채 목적
해송·상수리·삼나무·편백 등에 집중… 현재 일부만 남아

제주도의 인공 조림의 역사는 일제 강점기와 때를 같이한다. 한라산과 제주 전역을 대상으로 조림이 시작된 것은 1920년대다. 일제는 1914년 제주지역 임야 조사에 착수, 1922년에 임야 소유별 경계를 확정하면서 본격 조림사업에 뛰어들었다.

이같은 사실은 전라남도 제주도청(濟州島廳)이 1924년에 펴낸 '未開의 보고, 濟州島'에서도 확인된다. 이 책에는 1921년 봄 제주도에 산림과 출장소를 신설하고, 사업의 범위를 수목을 벌채시켜 수입을 도모하고, 한편으로는 어린 나무를 심어 조림을 하는 것으로 삼았다.

조림사업에 관해서는 벌채한 그루터기를 갱신하는 것과 현존하는 무입목지 1만여 정보(1만ha, 1정보=1ha·3000평)의 조림 등 두 가지로 나눴다. 벌채 그루터기의 조림은 현존림의 약 20%를 모수(母樹)로 해서 남겨두고, 이로부터 떨어지는 종자를 갖고 자연력에 의해 어린나무를 키워 갱신하려는 것이다.

무임목지의 조림은 50년간에 걸쳐 모든 조림을 끝낼 계획으로 1년에 약 200 정보(200ha)의 면적으로 조림하도록 계획했으며 1922년부터 착수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를위해 약 2ha의 묘포를 마련해 양묘중에 있으며 수종은 모두 소나무였다.

조림사업은 1922년부터 본격 시작된다. 일제의 조림사업은 당초 50년간에 걸쳐 1만ha(3000만평) 계획으로 착수됐으며 패망 직전까지 20여년간 계속됐다.

일제의 조림정책과 관련 제주도지(濟州道誌, 1982)는 '일제는 수탈임정(收奪林政)이 임상(林相)의 급속한 황폐화를 가져올 것으로 우려하여 육묘와 조림도 하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일제가 제주전역을 대상으로 펼친 조림사업을 기록한 '갱신대장(更新臺帳)'문서의 표지와 조림 상세내역.

일제가 20세기초 한라산을 비롯한 제주지역 조림에 공을 들인 것은 제주의 부원(富源) 때문이었다. 제주를 일본국의 부속섬쯤으로 여겼던 일제는 한라산의 산림자원에 눈독을 들였다. 그들의 표현대로 '미개의 대보고'인 한라산 산림자원 개척을 목적으로 벌채와 대대적인 조림에 나선다.

일제 강점기 제주지역 조림사실을 입증하는 문건은 본보에 의해 확인된 바 있다. 이 문건은 제주도가 보관중인 조림 관련 '갱신대장(更新臺帳)'이다. 취재진은 20세기초 한라산의 조림사를 추적하던 중 일제때 조림관련 문서를 확인했다. 조림대장은 일제의 이같은 식민지 산림정책과 조림내역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사료이다.

이 조림대장은 일제가 조림사업에 착수한 첫 해인 1922년부터 작성된 것으로 제주읍 아라리 한라산 국유림 지대 해송 조림을 시작으로 제주 전역의 국유림을 대상으로 조림한 내역을 담고 있다. 산림 구역인 임반(林班)·소반(小班)과 행정구역별 위치, 수종, 면적, 비용은 물론 활착률까지 자세하게 정리돼 있다. 전문가들은 "이 때가 한라산 국유림을 대상으로 경제적 목적과 식민지 개발을 위한 조림의 시초"라고 말한다.

조림대장에 기록된 것만 첫해 10ha(3만평)의 인공조림을 시작으로 1924년 제주읍 월평에 삼나무 27ha, 1925년에는 봉개, 용강지역에 삼나무 27ha, 편백 15ha를 조림했다. '제주산림 60년사'에 따르면 이 당시 조림 초기에는 자재의 운반수단이나 접근성이 편리하고 관리청에서 가까운 위치인 제주읍 지역을 중심으로 조림지역을 선정, 추진했다. 1928년부터는 애월면 광령리에 상수리나무 2ha 식재를 시작으로 도 전역으로 확대해 나갔다.

조림은 곰솔(해송, 흑송)과 상수리나무에 집중됐다. 초기 곰솔과 적송을 비롯해 편백, 삼나무, 상수리나무, 졸참나무, 비자나무, 잣나무, 황벽나무를 비롯해 한대 침엽수종인 이깔나무도 포함돼 있다. 표고자목을 확보할 목적으로 상수리나무를 집중 조림한 것이 눈길을 끈다. 당시 삼나무와 편백은 시험조림의 성격이 짙었다.

대단위 조림이 이뤄진 1936년에 조림수종별 면적은 해송 252ha, 삼나무 2ha, 편백 1ha, 상수리나무 239ha, 멀구슬나무 8ha, 밤나무 1ha 등 607ha에 대한 조림을 실시했고, 보조조림은 해송 125ha, 삼나무 2ha, 상수리나무 100ha, 상수리나무 직파조림 100ha, 유동 20ha, 검양옻나무 10ha 등 358ha로 총 조림규모는 965ha에 261만7000그루로 최고조에 달했다.

양묘는 개인업자를 중심으로 생산·공급했다. 1936년의 양묘생산실적을 보면 주 수종은 해송으로 101만6000그루, 삼나무 3만5000그루, 편백 5000그루, 상수리나무 137만2000그루, 가시나무 4000그루, 유동 1만2000그루, 검양옻나무 3000그루, 동백나무 3000그루 등으로 표고재배의 자목으로 쓰이는 상수리나무를 비롯해 해송의 묘목이 특히 많았다.

일제 강점기 조림사업은 광복되던 해인 1945년까지 계속돼 20여년간 모두 5078ha(1520여만평)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때 조림한 나무들은 벌채와 4·3때 대부분 소실돼 현재 남원읍 한남리와 동홍동 등 지역에 일부 남아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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