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년 지적원도를 바탕으로 현대지도에 표시한 제주성 모습. 잔존구간이 7군데에 불과하다.
1910년 읍성철거령에 따라 차례로 헐리기 시작
전체 3㎞ 가운데 10분의 1 정도 남아 명맥 유지
천년의 유산 제주성은 왜 대부분 남아있지 않을까. 탐라 이래 역사의 중심이자 도성 역할을 했던 제주성이 사라지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제주성을 비롯 우리나라 성곽이 파괴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에 의해서였다. 일제는 1907년부터 우리나라 성곽을 허무는 작업에 착수한다. 일제는 그해 7월 차관정치를 시작하면서 내각령 제1호로 성벽처리위원회를 설치했다. 성벽처리위원회는 동대문과 남대문 성벽을 비롯한 한양도성과 전국의 성벽을 다루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때부터 조선 500년 역사의 중심인 한양도성은 차츰 훼철되기 시작했다.
일제는 1907년 10월 요시히토 왕자의 한양 방문시 숭례문을 쪽문으로 비하하면서 그 옆의 성체를 없애버렸다. 왕자가 쪽문으로 성에 들어갈 수는 없다는 이유로 숭례문 옆의 날개벽 성체를 허물어버린 것이다. 일제는 이후 숭례문도 없애버리려고 했으나 임진왜란때 일본의 선봉군이 지나간 문이라며 숭례문과 동대문은 존치시켰다. 하지만 돈의문(서대문)은 1915년에 철거하고 만다. 이처럼 일제는 제멋대로 한양도성을 허물기 시작했다.
한양도성을 비롯 우리나라 성곽을 허물 목적으로 설치한 성벽처리위원회는 1908년부터 본격적으로 활동에 들어갔다. 성벽처리위원장에는 일본인 기노우치 주시로(木內重四郞) 내부차관이 임명돼 성곽 철거를 지휘했다. 성벽을 철거하는 책임자부터 일본인이 맡았던데서 일제의 의도를 알 수 있다. 이후 일제는 정략적이고 조직적으로 전국의 성곽을 파괴하는데 혈안이 된다.
제주성도 이즈음부터 본격적으로 훼철되는 운명을 맞게 된다. 1910년에 내려진 읍성철거령으로 인해 차례차례 헐리게 되는 것이다. 1913년부터 1918년 사이에 제주성 성문 및 문루가 차례로 철거됐다.
일제는 1925년부터 1928년 사이에 지금의 제주항인 산지항을 건설했다. 항만을 건설하면서 산지포구 앞쪽 바다를 매립하고 부두시설을 하는 공사가 이뤄진다. 이 당시 제주항 성돌들은 항만공사의 석재로 이용되면서 헐리기 시작했다. 제주성 북쪽 성과 서쪽 성이 이때부터 차츰 사라지게 된다.
일제가 제주성을 허물어 산지항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귀중한 고고역사 자료가 출토되기도 했다. 화천 등 기원 전후한 시기의 중국제 화폐가 다량 출토된 것이다. 이는 탐라가 기원 전후한 시기부터 중국과 활발한 교류를 이어왔음을 보여주는 자료들이다. 하지만 정식 발굴이 아닌 수습형태의 유물 출토여서 제대로 규명되지 못한 아쉬움은 크다.
성곽을 허문 자리에는 도로가 개설됐다. 성곽 기단부 위로 도로가 깔린 것이다.
▲일제 당시 사라진 제주성 서쪽 성벽을 허물어 그 자리에 도로가 개설됐다. 강희만기자
성이 훼철되면서 제주성의 구조는 완전히 망가져버렸다. 이로 인해 현재 제주성은 대부분 사라졌다. 때문에 제주성 규모는 일제 강점기인 1914년 제작된 지적원도를 통해 파악할 수밖에 없다. 일제는 지적원도를 제작하면서 각 필지마다 지번을 부여했다. 여기에는 효율적인 식민지 지배를 위한 노림수가 있었다. 처음으로 근대적 의미의 지번이 부여된 것이다. 이 당시 제작된 지적원도에는 제주성 치성과 둘레가 뚜렷이 남아있다.
지적원도를 통해서 성 길이를 측량한 결과 치성을 포함해서 약 3221m에 이르는 것으로 밝혀졌다. 면적은 46만7100㎡에 이른다. 치성을 포함하지 않은 경우는 2725m로 파악됐다. 산지천변을 따라 축조됐던 간성은 665m에 이른다. 제주성은 1565년(명종 20년) 제주목사 곽흘이 산지천변을 따라 축조했던 동성 성곽을 산지천 건너편 현재의 제주기상청 일대까지 확장하면서 오늘날과 같은 규모를 갖추게 된 것이다.
현재 남아있는 성벽의 높이는 오현단 인근 문화재 지정 구간의 경우 2.9~5.3m 이다. 지적원도를 통해 파악한 성벽의 폭은 해안과 인접한 제주성 북성의 경우는 13~14m, 나머지는 6~9m 정도 된다.
제주성에 대해서는 영국 해군 선박인 사마랑호도 조사한 것으로 나타난다. 사마랑호는 1846년 6월25일 도착하여 우도를 기지로 삼아 약 37일 동안 제주도와 거문도 일대를 정밀 측량했다. 또 제주도 해안선을 정밀 측량하고 한라산의 높이를 1995m로 계산하였다. 사마랑호를 이끌었던 에드워드 벨처는 1846년 영국으로 귀환 '사마랑호 항해기'를 남겼다. 이 책에는 제주성의 높이가 7.6m로 기록돼 있다. 아주 견고한 성벽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현재 제주성은 얼마나 남아있을까. 잔존 성곽은 전체 길이의 10분의 1 수준인 약 310m 정도에 불과하다. 간성은 아예 사라져버렸다.
치성은 20개 가운데 제주성 남문 오현단 인근 정비된 3곳을 제외하고는 건물지 등으로 없어졌다. 제주성이 남아있는 곳은 오현단 일대와 제주기상청 후문을 중심으로 8곳 정도 확인된다. 잔존 구간도 대부분 훼손되거나 상당부분 멸실된 상태로 파악됐다. 일제에 의해 훼철되기 시작한 제주성은 오늘날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