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시작하며]들녘의 신명

[하루를 시작하며]들녘의 신명
  • 입력 : 2014. 05.21(수) 00:00
  • 글자크기
  • 글자크기
해마다 3월이면 묘목 굴채작업이 시작된다. 포클레인에 일꾼들 여럿이 달라붙지만, 연일 계속되는 일정이 힘에 겹다. 굴채한 묘목들은 일단 가식해 놓는다.

이후 하루 식재할 분량 만큼씩 파내 뿌리를 다듬고 심기 시작하는 것이다. 일꾼들을 최대한 동원하지만 일손은 여전히 달린다. 기존 육묘장이나 과수원의 전정 비배관리 약제 살포 등 같은 시기에 이뤄지는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식재작업이 아직 한창인 4월 중순부터는 접목이 시작된다. 접목, 20여명의 기능사들이 1개월여에 거쳐 이뤄지는 작업이다. 저온저장고에 보관한 접순 중 혹 상태 나쁜 게 나올까봐, 혹은 품종 하나라도 뒤섞일까봐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한다. 한시도 자리를 뜨지 못 한다.

어느 것 하나 미뤄서 될 일이 아니기에, 그러므로 정신없이 돌아가는 일상이기에 차라리 신명이다. 어디서 북소리 꽹과리 소리 들릴 듯하다. 너울너울 빙글빙글 이윽고 박수무당 춤사위도 펼쳐질 듯 한 것이다. 이 들녘, 실로 해동의 신명 아닌가.

사력을 다한 권투선수가 링에서 바듯이 내려오듯, 날마다 저녁이면 파김치로 돌아온다. 그래도 괜찮은 것은 한잠 푹 자고 나면 새 사람이 되니까. 아침엔 일꾼들 보다 한 30분 먼저 농장에 도착한다. 새벽 공기를 마시며, 날로 싱그러워지는 나무들과 눈인사도 나누면서 한 바퀴 빙 둘러보는 것이 일과의 시작이다.

아무리 보아도, 나무는 나무라서 좋다. 하나같이 약삭빠른, 번드르르 말씀 좋고 똑똑한 사람 하도 많은 세상보다 나는 이 들녘이 좋다. 늘 설 자리에서, 묵묵히 제 길을 가는 나무들이 정말 좋은 것이다.

서둘러도 작업의 마무리는 6월을 넘긴다. 한 여름 오기도 전에 "지치면 안 된다"고, 늘 오버페이스를 경계하지만 그게 여의치 않다. 아무려나 이렇듯 전력질주할 수 있음은 얼마나 다행인가.

작년 이맘땐 다리를 다쳐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암울한 날들을 드러누워 잠을 자고 또 자고, 봤던 TV를 보고 또 보는 생활이었다. 기약 없음에 생각은 어찌 그리 많던지, 우리 속에 갇힌 야생마처럼 마음만 길길이 뛰고, 몸은 더듬더듬 목발 신세였으니…. 그때를 생각하면 맘껏 걷고 뛸 수 있는 오늘이 꿈만 같다. 감사하고 감사하는 것이다.

"할 만큼 했으니, 그만 좀 쉬라"는 주위의 조언을 자주 듣는다. 허나, 작품을 쓸 때 하루라도 펼쳐보지 않으면 못 견디듯, 내가 만든 농장에 내가 접붙여 키우는 나무들임에랴.

이 너른 농장, 어느 구석 어느 멍에의 나무 하나 돌덩이 하나엔들 내 손이, 내 뜻이 미치지 않은 데가 있을까.

남들은 "아주 잘 됐다"고 말하지만, 내 눈엔 아직 먼 것이다. 시어 다듬듯 고치고 또 고쳐야 할 미완의 작품인 것이다.

어찌 손을 놓는가? 시 한 줄 붙들고 씨름을 해도, 토씨 하나 건들지 못하는 밤이 있다. 어쩐지 일손이 영 잡히지 않는 날은 빈 걸음으로라도 그 농장 그 나무들을 한번 보고 와야 비로소 마음이 놓이는 걸 어쩌랴.

선거철마다 게거품 물며 제 입으로 제 자랑하는 이들, 한사코 악을 쓰며 기어이 상대를 깔아뭉개는 이들, 자기 아니면 안 된다고 허구한 날 목이 바짝 쉬는 이들…. 아무려면 그 짓거리보다야 좀 낫지 않은가 싶은 거다.

그래, 어진 사람들 만나러 농장에 간다. 날로 달로 크는 손녀들 보러 매일 농장에 간다. 그렇다. 서러운 내 유년의 작은 꿈을 찾아 오늘도 나는 농장에 가는 것이다. <강문신 시인>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8332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