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파도를 가득 메운 보리밭 사이로 사람들은 느릿느릿 유유자적하면서 걷는다. 뒤로 송악산과 산방산 그리고 한라산이 지척이다. 사진=한라일보 DB
'삶의 속도'가 행복의 속도·방향을 결정하지 않는다
자연속 사람들 만나며 맘껏 쉬는 마음길
삶의 속도 늦추는 '슬로시티' 운동 확산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현기증이 날만큼 빠른 속도로 내달린다. 그렇게 앞만 보고 달려도 삶은 늘 팍팍하기만 하고 여유로움을 찾기가 녹록지 않다. 그래서일까. 쉼에 대한 열망은 더 클 수밖에 없다. 세계적으로 '슬로 라이프' '슬로시티' '슬로푸드'가 콘텐츠로 떠오르고 있다.
'슬로라이프'를 이야기하는 이들은 '삶의 속도'가 '행복의 속도'와 '방향'을 결정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어찌보면 '멍때리기' '한눈팔기' '어슬렁거리기' '빈둥거리기'가 그리워질 지 모른다. 그 마음의 뿌리는 '느리기에 행복한 삶'에 있다.
이것이 제주의 경쟁력이 될 수 없을까. 광속을 추구하는 디지털 시대에 살면서 아날로그를 꿈꾸는 이들이 많다는 것은 희망적이다. 예컨대 우리는 늘 시골마을이 원형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 있길 바란다. '개발'도, 더불어 '시간'도 멈추길 바란다. 정신적인 여유가 있는 삶을 꿈꾸면서도 손에 쥔 물질에 연연하는 이들에게 '슬로 비즈니스'가 또다른 대안이 되지 않을까.
제주의 옛길, 아름다운 길, 사라진 길을 되살려 걸으며 제주의 속살을 느릿느릿 걷자고 탄생한 것이 '제주올레'가 아니던가. 어찌보면 제주도가 개발위주의 성장을 지속해오다가 '잠시 멈추고 돌아봄'을 선언한 것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2015년 '슬로'가 제주의 경쟁력이 될 수 있도록 이 지면을 채워 나간다. 앞으로 제주속 '느림'현상과 '느림'을 즐기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실려진다.
▶왜 슬로시티일까=1999년 10월 이탈리아에서 '위협받는 달콤한 인생'의 미래를 걱정하며 '치따슬로(cittaslow)' 즉 슬로시티(slow city)운동을 출범시켰다. 이 운동은 슬로푸드 먹기와 느리게 살기로부터 시작됐다.
이 운동을 하는 이유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염원하며 우리는 다르게 살기 위함이다. 슬로시티의 철학은 성장에서 성숙, 삶의 양에서 삶의 질로, 속도에서 깊이와 품위를 존중하는 것이다. 느림의 기술(slowware)은 느림(Slow), 작음(Small), 지속성(Sustainable)에 둔다. 속도가 중시되는 사회에서 슬로시티 프로젝트가 비현실적일지는 몰라도 1999년 국제슬로시티운동이 출범한 이래 올해 8월 기준 29개국 189개 도시로 확대됐고 국내에서는 진안군 등 11개 지역이 슬로시티에 선정됐다. 아직 제주에는 없다.
선언문을 보면 '우리는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하여 노력하는 사람들이 흥미를 갖는 도시, 훌륭한 공공장소와 극장·가게·카페·여관·사적, 그리고 풍광이 훼손되지 않은 도시, 전통장인의 기술이 살아 있고 현지의 농산물을 활용할 수 있는 도시, 건강한 음식·건강한 생활·즐거운 삶이 공동체의 중심이 되는 도시를 추구한다'로 되어 있다.
제주의 '슬로 빌리지'로 손꼽히는 공동체마을 선흘1리에는 숲과 습지를 지키면서 느리게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슬로 빌리지 '선흘1리'=선흘1리는 2011년 습지생태체험 사업을 시작으로 2013년 람사르마을, 2014년 환경부 지정 생태관광지가 되면서 주민들의 주체적 생태관광 프로그램 개발과 보전활동, 마을 생태축제를 통한 공동체 회복 프로그램들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는 중이다.
고제량 제주생태관광협회 대표는 "선흘1리 생태관광은 환경보전과 지역주민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자연지역으로 떠나는 책임여행"이라고 강조한다. 선흘1리는 선흘곶 동백동산이라는 생태적 가치가 높은 보호지역을 대상으로 주민들이 직접 여행프로그램을 기획한다. 마을에는 '길토래비'라는 마을해설사들이 있다. 선흘1리는 동백동산 숲과 습지, 마을이 서로 같이 느리게 살아가고 있다.
▶슬로 아일랜드 '가파도'=드넓은 청보리밭을 달팽이처럼 느리게 걸어보고 싶은 섬이 바로 '가파도'이다. 봄이면 섬은 온통 청보리 물결이다. 무려 56만1000㎡의 들판에 청보리가 출렁인다. 유채꽃과 보리밭이 어우러진 길을 걷다 보면 여행자는 시간여행을 떠나온 듯한 착각에 빠진다.
낮은 섬 답게 가파도에는 높은 건물이 없다. 그러니 섬의 어느 지점에서도 바다를 볼 수 있어 눈이 시원하다. 섬은 천천히 걸어도 한 시간이면 족할 정도로 작다. 조금이라도 청보리밭에 더 오래 머물고 싶다면 가파도에서는 달팽이처럼 느리게 걸어야 한다.
▶양적 관광시장 벗어나 행복한 여행으로=관광시장도 마찬가지이다. 지금까지 양적 성장에 주목했다면 앞으로는 '느림'을 통해 자연친화적인 자원을 활용하고 관광시장을 새롭게 변화시켜야한다는 '대안여행'에 대한 목소리가 주목받고 있다. 많이 보고 즐기는 관광이 아니라 천천히 깊이를 보고자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대안여행' '생태여행'의 목표는 환경보전과 지역생산물로 만든 음식을 먹으며 지역주민이 운영하는 숙소를 이용하고 천천히 치유와 휴식을 하는 '로컬 라이프'와도 맞닿게 된다.
이현숙기자
[전문가 제언/김민수 슬로푸드 제주지부장]자연에 따라 사는 제주
"잘 살게는 된 것 같은데 어떵 영 쉴 시간이 어신고? 옛날엔 비오민 다 쉬어신디." 이제 80세를 바라보시면서도 농사지으시는 어머니가 툭 던지시는 말씀이다. 결코 환한 표정이 아니셨다. 정말 이상하다는 표정이셨다.
평생 서귀포에서 농사를 지으신 분은 이렇게 당신의 세상을 느끼시고 계셨다. 25년을 서울에서 보내고 2008년 귀향할 당시 나도 관광객의 느낌과 그리 다른 느낌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동안 해외여행에 밀리던 제주가 올렛길로 드러내기 시작한 속살에 사람들이 열광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사람들은 제주도하면 섬 제주를 떠올린다. 그 다음 무엇이 떠오를까? 떨어져 있음이 아닐까? 자신이 속한 세상이 가진 특성과 떨어져 있음, 즉 다름이 아닐까? 자신의 세상을 번잡하다고 느끼면 한가로움이고, 정신없이 돌아가는 세상에 산다고 느끼면 부드럽고 편안한 흐름이 아닐까?
우리는 어느 순간부턴가 자연의 시간 맥락과 공간 맥락을 상실하여 살아가고 있다. 제철이 아닌 농업을 하고, 지구 반대편 농산물을 먹고, 우리 옛 음식은 밀쳐두고 전 세계적으로 표준화된 음식인 패스트푸드를 먹고, 옆 사람은 밀쳐 두고 먼 곳의 사람과 얘기를 나눈다.
또 우리는 자연의 속도가 아닌 속도로 많은 것을 한다. 자연의 속도가 아닌 속도로 동물을 사육하고 그 결과 우리 애들도 성조숙증에 걸리게 빨리 키운다. 자연의 속도가 아닌 속도로 환경을 소모하여 자원을 고갈시키고 환경을 파괴한다.
남달리 귀하려면 다름이 있어야 한다. 제주도가 귀해질 다름은 무엇일까? 올렛길 평가에는 늘 '느림의 미학'이 나온다. 최근 제주푸른콩장, 꿩엿, 순다리, 흑우 등과 같은 제주도에서 사라져가는 소중한 음식자원들을 슬로푸드 맛의방주에 등재하고 보존하는 움직임도 있다. 제주의 생명·문화다양성을 지켜 제주의 독특함을 바탕으로 제주를 귀하게 가꾸려는 운동이다. 획일화 세계화 경향에 맞서 슬로푸드, 슬로시티, 슬로라이프 등 많은 영역에서 지역의 독특성, 전통, 다양성, 자연을 존중하며 살자는 느림을 가치철학화한 움직임이 있다. 제주를 오래 귀하게 할 다름은 이런 느림의 가치를 중심에 둘 때 나오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