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이라 불리는 나라의 의료제도를 접할 때마다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것 중의 하나는 의료시스템의 기획, 투자, 지원, 관리에 있어서 지방정부의 역할과 비중이 크다는 점이다. 지역 주민들에게 필요한 양질의 서비스 제공을 위해서 현재와 미래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투자하고 지원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지방정부가 담당한다. 그리고 그 과정은 지역주민의 표로 심판받고 수정된다. 여기에 덧붙여 중앙정부가 지역간 균형을 위한 일정한 기획 조정 기능을 발휘하는 게 대다수 선진국들의 모습이다.
우리나라도 지방자치를 실시한 지 20년이 지났건만 그 기간동안 지방선거에서 의료 관련 현안은 여전히 중심 의제 밖 변두리에 머무르고 있다. 성남시립병원 건립 공약이 후보의 당락을 결정했던 2010년 성남시장 선거만이 필자가 기억하는 유일한 예외다. 나름 의료제도 입장에서 생각해 본 이유 몇 가지를 짚어보자. 우선 1977년 의료보험 시작 전후로 중앙정부의 정책과 행정력에 의해 변화 발전하고 있는 우리나라 의료시스템에 내재된 관성의 힘을 꼽고 싶다. 당시 보험료 걷고 보험증 나눠주려다 보니 국민들이 찾아갈 병의원이 부족했다. 부족한 병의원 시설을 늘리려고 중앙정부가 발벗고 나서서 선진국 개발원조자금을 빌려다가 장기 저리의 특별 융자를 지원하면서 힘들게 전국민의료보험제도를 정착시켰다.
'3시간 대기 3분 진료'의 폐해가 남아있기는 하지만 국민건강보험제도 운영을 위한 보험료 징수, 의료기관에 대한 진료행위 심사와 보상, 의료기관 진료 적정성 평가 관리와 같은 국민들 피부에 와닿는 의료보장정책이 중앙정부 주도로 자리를 잡으면서 병원과 관련된 의료관련 현안에 지방정부가 개입할 역할과 여지는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던 것이다. 나아가 이제는 그건 중앙정부가 할 일이지 지방정부가 할 일이 아니라는 인식이 점점 굳어져가고 있지 않나 싶다.
둘째, 영리법인 의료기관 개설 허용을 제외한 실질적인 의료기관 개설 운영의 실질적 주도권을 민간과 시장에 일임한 탓도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의료기관 규모, 개수, 분포를 결정할 권한이 민간과 시장에 넘어간 탓에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모두 의료기관 개설 운영에 개입하기도 어렵거니와 개입하려 하지도 않게 된 것이다. 단지 공공병원을 더 만들거나 늘이는 문제만이 아니라 민간 병원에 대한 지원도 대단히 인색하게 되었다. 좋은 병원이 얼마나 가까이에 있느냐 없느냐, 서비스의 질이 좋냐 나쁘냐는 주민들 피부에 와닿는 중요 민생 현안인데도 지방정부 정치인과 행정력이 개입할 여지가 적고 좁다는 뜻이다. 이런 와중에 병원 관련 인력, 자본, 시설의 서울집중 현상이 강화되어 왔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의료, 복지, 교육과 같은 대표적인 민생정치 분야에서 중심 역할을 수행할 진보정당, 좌파정당의 역할 공백이다. 의료 관련 현안 관련해서 민심을 추동하고 기존 정당의 자극제가 되어줄 그들의 역할이 미미하고 부족했던 것도 중요 요인의 하나일 것이다. 이처럼 지역 의료의 수준을 결정하는 지방정부의 영향력이 미미하다 보니 지역 현안 해결을 위한 노력은 자연히 중앙정부로 향할 수밖에 없다. 국립대 의대 신설 요구가 대표적 사례다. 작년 순천·곡성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새누리당 이정현 의원 대표 공약이 국립순천대 의대 신설과 국립순천대병원 건립이었다. 목포대, 창원대, 인천대 심지어는 서울시립대까지 의대 신설을 내걸고 교육부를 드나들고 있다. 결과는 지켜볼 일이다.
국립대 의대 신설로 의료수준 향상의 기회를 경험한 제주 입장에서 그 다음 발전전략 카드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지역정치 말고는 다른 답이 쉽게 떠오르질 않는다. <박형근 제주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