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경실칼럼] 인간의 비극과<br>희극에 대한 사색

[고경실칼럼] 인간의 비극과<br>희극에 대한 사색
인문학에 길을 묻다<10>
  • 입력 : 2015. 09.14(월) 14:20
  • 뉴미디어부 기자 hl@ihalla.com
  • 글자크기
  • 글자크기
영국의 대문호 월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는 1564년에 태어나서 1616년까지 살다간 극작가이며 시인이다. 그의 작품은 영어로 된 작품 중에는 세계 최고라는 찬사를 받고 있으며 지금까지도 전 세계 극장가에서 연극이나 오페라로 거듭나고 있다.

 그는 인간들의 삶의 모습을 너무도 사실적으로 희극과 비극이란 감성으로 표현했으며 500년이 지난 현 시점에서도 그 배우들이 읊조리는 대사들은 시가 되어 인류에 회자되고 있다. 셰익스피어란 대문호의 탄생은 영국이란 나라의 상징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문화콘텐츠의 위력을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15~16세기 인간들이 그려내는 비극과 희극에 대한 대문호의 독백이 21세기를 살고있는 우리에게 어떤 그림으로 다가오고 있을까? 이 가을 서재 깊숙이 꽂혀있는 '맥베스'의 마지막 그림자를 찾아보고 있다.

 대문호의 비극과 희극은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오나

 이 작품에서는 마녀의 꼬임이라고 하지만 결국 스코틀랜드 맥베스장군의 가슴속에 있던 욕망은 자기가 모시던 왕을 암살시키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결과를 불러온다. 왕의 암살을 덮으려는 거짓은 친구와 부하를 모두 죽이게 되는 또 다른 악의 결과를 불러온다. 그러한 악의적 결정은 실질적인 삶에 행동과 통치에 반영되었고 스스로 그 올가미에 갇혀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도덕, 양심, 법을 모두 무시한 채 얻으려는 욕망은 채웠지만 시간의 흐름이라는 절대 진실 앞에서 무기력하게 죽음으로 귀환하는 지점에서 그는 이렇게 독백한다. "내일 또한 내일, 그리고 내일이 날마다 좁은 보폭으로 기어서 기록된 시간의 마지막 지점에 도달한다. 그리고 우리가 보낸 모든 어제들이 먼지뿐인 죽음으로 가는 길을 밝혀왔다. 짧은 양초가 꺼진다, 꺼진다! 인생이란 단지 걸어 다니는 그림자 무대 위에서 주워진 시간 동안만 뽐내거나 초조해하다가 더 이상 아무소리도 내지 못하는 불쌍한 배우이다. 인생은 바보가 말해주는 이야기 소리도 시끄럽고 광기도 그득하지만 아무 의도도 없는 것... ..."

자신이 저지른 과오 때문에 예견된 죽음이란 검은 그림자가 서서히 좁혀오는 심적 고통을 리얼하게 묘사하며 비극의 극치를 느끼게 한다. 죽는 순간에 영혼마저 어둠에 수렁으로 떨어지는 절망을 그려내고 있다. 대다수의 비극이란 자신의 욕망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결과로 만들어지는 산출물이다.

 그럼 대표적인 희극이라 할 수 있는 '베니스의 상인'을 보자. '벨몬트의 아름다운 여자 상속인 '포르티아'에게 청혼하려는 '바사라오'는 3000두 카트를 빌려달라고 친구인 베니스상인 '안토니오'에게 부탁한다.

 그러자 '안토니오'는 자신의 선박을 담보로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에게 돈을 빌린다. '샤일록'은 돈을 빌려주는 대신 계약기간을 지키지 못하면 '안토니오'의 살 1파운드를 담보로 요구한다. 그렇게 계약은 이루어졌고 '바사라오'는 친구 '그라티아노'를 데리고 벨몬트로 간다. 그는 그 곳에서 '포르티아'의 초상화가 들어있는 구리상자를 골라 구혼에 성공한다. '그라티아노'도 '포르티아'의 시녀인 '네리사'와 결혼한다. '샤일록'의 딸인 '제시카'와 사랑에 빠져 함께 도망쳤던 '바사라오'의 친구 '로렌츠'도 그곳에 찾아온다.

 하지만 '안토니오'의 배가 행방불명되고 계약기간이 만료되면서 '안토니오'의 살 1파운드를 내놓으라고한다. 이제 '안토니오'는 친구를 위해 죽음의 순간에 이르렀다. 그러자 '포르티아'와 '네리사'는 남편들 몰래 재판관과 서기로 변장해서 '안토니오'를 위해 달려온다. '포르티아'는 '샤일록'에게 안토니오의 살 1파운드를 가져가도 좋지만 그 살을 베어낼 때 피를 한 방울이라도 흘리면 '샤일록'의 전 재산을 몰수하겠다고 말한다. 결국 샤일록은 패소하고 전 재산을 몰수당하고 그 절반은 사위 '로렌츠'에게 물려준다'는 내용으로 요약된다.

 이 작품도 전반부는 비극적인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 반전이라는 카드를 꺼내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가 보는 대다수의 드라마도 우여곡절 끝에 해피엔딩으로 작품을 종결짓곤 한다. 이들은 대다수가 희극이다. 두 작품을 보며 15세기의 비극이나 21세기의 비극이나 별반 다름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비극이 없으면 희극도 없다

 결국 사람이란 희극과 비극의 결합과 순환 속에서 더욱 드라마틱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고 본다. 희극이란 작품 속에서 비극과 희극의 조화를 어떻게 이뤄낼 것인가, 비극 속에서도 희비의 메카니즘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를 통해 시간의 흐름 속에서 희극을 선택할 것인지 비극으로 남을 것인지를 결정한다고 본다. 비극이 없으면 희극도 없다.

 그러나 욕망이라는 마녀의 속임수에 얼마나 더 빠지느냐에 따라 성실한 질서의 한계를 망가뜨리는 우를 범해서는 안됨을 교훈으로 주기도 한다. 독자들에게 익숙한 두 작품을 도입한 이유는 과거를 살았던 배우들과의 대화를 통해 현재를 살아간다면 생각지 못했던 지혜를 삶의 중심으로 가지고 올 수 있을 것이며 어떻게 바람직한 인간으로서 시간을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사색의 단초를 제공하고 싶어서이다.

 그 누가 인간의 시나리오를 쓴다 해도 희극과 비극의 선을 교접시키는 절묘한 그림을 그려내는 모습이 될 것임은 분명한 것이다. 지금도 흔히 벌어지고 있는 욕망의 굴레로 인해 영어의 신세가 되는가 하면 심지어 소중한 삶을 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런가하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가족을 사랑하고 이웃과 나누면서 배려하는 삶으로 아름다운 동행의 모습을 보여주는 삶을 살고 있기도 하다. 우리는 이러한 인간들의 세계를 오늘도 함께 만들어가고 있고 아마 앞으로도 그렇게 미래를 그려 나갈 것 이라는 생각이다.

 보통 우리 인생은 희극과 비극이 음양과 같이 통합되면서 온전한 삶으로 나타난다. 비극이라 할지라도 욕망의 늪에서의 억지 비극이 아니고 희극 역시 스스로 자연스러움 속에서의 희극을 운용하는 삶의 모습이 아름다움에 극치가 아닐까싶다.

건강한 비극으로 시작해 희극으로 끝나길 소망

 필자는 이 순간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늘 건강한 비극이 먼저고 희극으로 결말을 맞이하는 해피엔딩의 세계로 나아갔으면 하는 소망을 가져보고 있다.

 귀뚜라미소리가 요란한 가을밤 익어가는 곡식들의 향기가 고소하게 코를 자극한다. 부스럭거리며 넘기고 있는 셰익스피어의 비극과 희극의 시나리오 속에서 모두를 초월하는 낭만이 한권의 책을 더 읽도록 향긋한 커피처럼 나를 자극하고 있다. 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5929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