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경실칼럼] "님아! 그 강을 건너지마오"

[고경실칼럼] "님아! 그 강을 건너지마오"
인문학에 길을 묻다<11>
  • 입력 : 2015. 09.24(목) 11:38
  • 뉴미디어부 기자 hl@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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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극장가에서 눈물꽤나 흘리게 했던 다큐영화의 제목이다. 고소한 커피 한잔을 탁자위에 올려놓고 그윽한 향기가 코끝을 자극할 때쯤 한라산 백록담위에 걸쳐있는 흰 구름이 스크린이 되고 그동안 살아온 삶이 드라마가 되고 영화가 되어 아련히 흐르게 된다. 때로는 등에 땀이 베일만큼 긴장하기도 하고 때로는 한잔 술에 취해 이 세상을 다가진 것처럼 비틀 대기도했으며 가까이 있었던 가족들과 헤어지면서 가슴을 치고 통곡도 했던 장면들이다.

 내일이면 멋진 인생의 항로가 펼쳐질 것이라는 기대 속에서 아이들에게 '조금만 기다려라 조금만 기다리면 너희가 먹고 싶고 갖고 싶은 것을 장만해준다'던 공약 아닌 공약을 수없이 남발했던 그런 장면들도 지금 겸연쩍게 드러나고 있다.

 나는 어떻게 생각하면서 살아왔던가

 보릿고개의 농촌시절을 겪었던 우리네는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파 속에서 늘 생경한 삶으로 순간순간을 치열하게 버티면서 가을바람이 불 때면 스산한 기운을 온 몸으로 받아들여야했던 그런 장면들도 새롭게 각인되곤 한다. 나는 어떻게 생각하면서 살아왔던가. 무심코 순간순간을 살아가는데 급급했던 것은 아니었던지, 나머지 다가오는 삶은 애틋한 사랑의 끈으로 이어갈 수 있는 것인지 하는 회한이 피어오른다.

 간간히 흐르는 TV뉴스에서는 남편이 오랜 시간을 같이 해오던 부인을 죽인 후 자신도 따라 죽었다는 어느 노부부의 이야기가 들려온다. 부인이 치매에 걸려서 끝까지 같이 가기에는 너무도 힘에 부쳤던 것 같다는 논설이 있기도 했다. 또한 어떤 영화에서는 요양원에 있던 노부부가 차를 몰고 드라이브를 하다 폭설을 만나 길을 잃고 차속에서 죽어가면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손을 잡고 갔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리고 그 부부가 끝으로 이 세상을 향해서 한 한마디는 자녀들을 사랑한다는 말이었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마오.'는 어떠한가. 이 영화는 강원도 횡성의 아담한 농촌마을에 89세 소녀감성 '강계열' 할머니, 98세 로멘티스트 '조병만' 할아버지가 76년째 연인으로 오순도순 소꿉장난처럼 살아오다 '조병만'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남은 시간이 한 달만 더 있었으면' 하는 작은 소망을 담은 이야기이다.

  남은 시간이 한 달만 더 있었으면..

 하루도 손을 놓지 않고 매일같이 만남을 행복으로 삼았던 이분들은 엄청난 부자도 명예나 권력을 가진 것도 세상을 바라보는 성자도 학자도 아닌 소박한 농촌의 순박한 농부였다. 그분들은 다이아몬드나 사파이어 같은 보석들이 존귀한지도 모른다. 수많은 음식들이 있지만 당신 손으로 만든 음식이 제일 맛있었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항상 들판에 널려있는 꽃을 꺾어 할머니에게 주고 싶은 마음과 그리고 행복한 마음으로 그렇게 살았던 삶이다.

 필자는 오늘아침에 뉴스에서 '사람을 죽여 트렁크에 담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온몸에 소름이 끼침을 느꼈다. 어찌 사람이 이토록 잔인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요즘 술자리에서 심심치 않게 거론되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 영감이 빨리 가셔야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다'하는 젊은 자녀들이 하는 말이다. 옛날처럼 공자왈 맹자왈 하는 시대가 아니라 인성교육이 교육 목적이라고 하면서 교육현장을 혁신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부부간에 늙어도 젊어도 늘 한결같이 서로에게 반려의 길을 택하는 것 보다 순간의 달콤함이 매력적인 것으로 가치의 변화를 겪는 듯한 농담들도 거침없이 쏟아지는 시대이다. 세태의 변화에 따라 사람들이 가치관도 천태만상으로 변하고 있다고들 한다. 무엇이 올바른 삶이란 말인가. 오늘도 오래된 이야기들을 다시 꺼내본다.

 시원한 냉수같은 '님아! 그강을..'

 이런 시대에 이 영화는 다시 한 번 시원한 냉수를 먹여주는 이야기인 듯싶다.

 이 노부부가 이야기하는 삶이야 말로 세로토닌을 분비하게 하는 삶이요 최고 가치를 지닌 삶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화려함이나 구호의 번지르르한 삶, 한평생 혼자 인류 구원의 숙제를 안고 있는 삶, 나 혼자만을 위하는 사명을 이유로 살고 있는 영웅적인 삶에 모습들이 있을 것이다.

 
아마도 모든 사람들이 다양한 가치 매김을 기준으로 만물에 비유할 만큼 백가쟁명의 드라마를 연출하고 있고 그에 불평하고 질투하며 혹은 행복하다고 하면서 그렇게들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순결한 자연(스스로 그러함)이 펼쳐지는 삶을 평면적으로 보여준 이 노부부의 모습을 들여다보면서 우리의 삶에 방향성도 잡아보면 어떨까 싶다. 나의 삶에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하루하루, 한 시간 한 시간이 뭉쳐서 내 삶의 벽돌이 놓인다고 한다.

 돈, 명예 그리고 권력 등 끊임없는 욕망의 시녀가 되어 살다가 어느 날 문득 늙어버린 자신을 발견하고는 슬픔에 빠지기도 한다. 우리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시공간의 틀 속에서 주어진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아내의 마음 하나에 집중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어떤가

 많은 것을 소유하려 하지 말고 아내의 마음 하나에 집중하면 어떠할 것인가 하는 마음으로 지금의 순간을 살아간다면 하는 생각에 방점이 찍힌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은 요양원으로 가는 경우가 있고 요양원에서 이제 혼자 적적하게 암흑의 세계를 향해 떠나는 이도 있다. 한 평생 같이 살았던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서 원수를 갚느니 한을 풀어야 한다느니 하면서 떨어져 살겠다고 악을 쓴다.

 그러다 결국 거동이 불편해지면 벽을 바라보며 눈물 지으며 나 홀로 그 무서운 암흑을 향해 나가고 있다. 거친 삶의 과정에서 유혹도 있고 미흡함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불안전한 인간들이기에 음과 양이 화합해서 생명을 탄생시키고 새로운 삶의 시공간을 창조하도록 하고 있다.

 화해하고 용서하면서 반전의 삶의 후반부를 만들면 어떨까 한다. 그래서 보이지 않은 세계로 갈 때면 사랑에 작은 등불로 앞을 밝히면서 늙은 부부가 손을 잡고 새로운 미래를 키워내면 더욱 아름답지 않을까 싶다.

 세상은 움직임 속에 고요함이 있다. 고요함 속에 움직임이 존재한다. 통합 속에 분열이 있고 분열 속에 통합이 있다. 음과 양의 이치가 다 그러하다는 것이다.

 헤어짐에는 만남이란 새로움이 있는 것이다. 만남이란 새로움 속에는 헤어짐이란 이별이 존재한다. 언제나 하나 됨에는 그러한 속성이 내재되어 있기에 우리 삶 속에서 지혜로움으로 포용과 상생의 아름다움을 연출할 수 있다면 하는 소망을 갖기에 이른다. 헤어짐을 위한 헤어짐, 비극을 위한 비극으로 자신을 소모품처럼 내팽개칠 것이 아니라 사랑과 포용으로서 완전체를 만들어 냄으로써 더 멋진 다큐를 찍어보는 것이다.

 생뚱맞게 영화이야기를 하고 사건 사고이야기를 늘어놓은 이유는 우리의 모습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의 삶에 멋진 길이 있음을 자각해보기 위해서이다.

 멋진 삶은 나 스스로에게서 찾는 소박함

 다른 데서 찾지 말고 나 스스로에게서 인간의 도를 찾아보는 현명함 그것은 '님아! 그 강을 건너지마오'라는 삶 속에 소박하게 담겨있다는 생각이다.

 들판에 피어있는 작은 찔레꽃 얼굴처럼 순박한 모습으로 아름답게 그렇게 살고 있는 모습 속에 필자의 삶도 함께 녹여내고 싶어서이다. 다가오는 우리의 미래에는 어떤 그림의 무늬로 아로새겨질 것인가.

 가을바람 따라 흘러가는 하얀 스크린 같은 구름 속에 그 상상의 나래를 따라가 보는 순간이 됐으면 해서이다.

 결국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는 더 인간다워지는 새로움에 귀 기울여보아야 할 것이다.<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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