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과 동산들 사이로 오래된 농로길이 그림처럼 펼쳐진 모습(위)과 산촌마을 분위기를 자아내는 정겨운 마을 전경(아래).
설촌의 시초는 삼별초시대… 40여개 동산으로 빚어진 마을 일제시대때 금덕리로 불리다 1995년 유수암리 지명 되찾아 한달 평균 20명 마을 전입… 원주민과 상생·신뢰쌓기 숙제 주민들 "일자리 창출위해 체험형 휴양마을 사업 확대할 것"
흐르는 물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 마을 이름이 가지고 있는 지속적인 메시지. 세월 또한 그러하다. 물과 산이 함께 바다로 흘러가는 모습은 교향악을 닮았다. 엄청난 양의 음표들이 높고 낮음, 빠르고 느림을 연주하여 바라보는 이들의 멜로디 감각을 자극하는 마을. 해발 1000미터가 넘는 노로오름에서부터 노꼬메오름 동쪽과 족은노꼬메오름을 타고 내려오면서 궷물오름을 지나 장전리와 인접한 지역까지 무려 40여개가 넘는 크고 작은 동산들로 견고하게 짜여 있는 모습. 궤녜기동산, 꽝남동산, 건내미동산, 덕훼동산, 도로쇄동산, 볼레남동산, 소로기동산, 싸리비동산, 지금이동산 등 가히 동산으로 빚어진 마을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듯하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고 했다. 골이 깊으면 물이 고이고 샘이 솟아난다. 거기에서 오묘한 땅의 맥박을 느끼던 사람들이 살았을 것이다. 풍수지리가 사회적 통념이던 옛날, 항몽삼별초군과 함께 따라온 고승이 절산 아래 샘을 따라서 조그마한 암자를 지어 태암감당(泰岩龕堂)이라 이름 짓고 살기 시작한 것이 설촌의 시초라고 한다. 세월이 흘러 원나라가 망하고 명나라 제후국 수준의 조선이 개국된다. 이 지역에 목장지대의 기능을 부여하여 상하·잣성을 쌓고 10소장 중으로 구분할 때, 5소장과 6소장 경계인 허문도에 마통을 둬서 5소장과 6소장의 마필을 점호하였으므로 여기에 종사하는 목자와 화전민들이 거문이물 주위로 모여들어 한 마을을 이루니 그 마을 이름을 '거문덕이'라고 하였다. 그 후에 1590년 경, 지방토호의 한 사람인 좌수 홍덕수가 많은 사람들을 이주시켜 유수암천을 중심으로 모여 살게 하였다. 그 당시 마을의 큰 틀이 지금까지 이어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수령 450년을 자랑하는 팽나무가 유서깊은 마을임을 보여준다.
이 아름다운 지명이 조선 중기 이후 마을 이름으로 내려오다가 일제강점기 금덕리로 부르게 되었다. 4·3 광풍에 여느 중산간 마을처럼 소개령의 피해를 입었다. 다시 돌아와 재건하고 살면서 역대 이장들이 끊임없이 노력한 것이 있었다. 일제가 강제적으로 바꿔버린 마을 이름을 원래 유수암리로 돌려놓는 일이었다. 계속 실패하다가 1995년 광복50주년을 맞이하여 문민정부가 펼치는 일제 잔재 청산과 민족정기 회복 정책에 힘입어 '옛 지명 찾기 운동' 차원에서 마을 주민들이 뜻을 모아 지방자치 조례에 따라 찬란한 정신문화를 꽃피워 온 조상들의 얼이 담긴 流水岩 이란 옛 이름을 다시 찾아 1996년 1월 1일부터 마을의 행정명, 법정명으로 다시 쓰게 되었다. 당시 전통적 가치에 대한 마을 주민들의 의식수준이 높게 평가 되었다.
이영춘 이장
한라산의 정기가 오름들과 동산들을 타고 수산천까지 이어져 내려온다. 북서쪽으로 내달리는 지맥을 가로지르는 큰 도로가 2개 지나간다. 평화로와 산록도로다. 유수암리 마을 입장에서 보면 자연의 흐름이 길로 동강난 느낌이다. 외부에서 보기에는 평화로가 마을 중심을 지나가기 때문에 교통이 편한 것으로 알게 된다. 그러나 정반대였다. 이영춘(63 )이장이 밝히는 문제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행정적으로는 애월읍에 속해있지만 생활권은 제주시 도심지역에 더 가깝습니다. 주민 1350명이 살고 있는 곳에 직행버스가 없으니 마을 발전에 가장 큰 걸림돌입니다." 마을어르신들이 병원 나들이도 하귀까지 가서 버스를 갈아타고 돌아서 가야하는 실정이니 불만 정도가 아니라 폭발 일보 직전의 분노였다. 더 큰 문제는 주민의 70%에 육박하는 이주민들과의 융합. 유수암리라고 하는 마을공동체 문화를 이해하려 들지 않는 현실이라고 한다. 수많은 숙박업체와 다양한 시설들이 유수암리에 들어와 있고 별장과 같은 집들을 짓고 살고 있으면서도 유수암리라고 하는 마을 구성원으로서 함께 해야 할 일은 외면하고 있다고 한다. 한 달에 평균 20명 이상이 전입해 들어오고 있는 유수암리. 마을회관을 그저 행정적으로 자신들과 관련된 일을 처리하는 곳으로 여기고 있었다. 지극히 도시에서 몸에 배어버린 습관이 그대로 유수암리에서도 반복되는 것이리라. 이러한 괴리감은 유수암리 만의 문제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닥쳐올 제주도 전체의 문제이기 때문에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기 위한 행정적 노력이 절실하다고 마을 주민들은 입을 모은다.
체험휴양마을로 거듭나기 위해 운영중인 농촌체험관.
'체험 휴양마을 만들기' 노력은 참으로 대단하다. 환경부로부터 환경교육프로그램을 인증 받고 있으며,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으로부터 전통문화 인성교육센터로 지정되어 있다. 농촌사랑 시범마을로서 체험관을 운영하고 있다. 이윤정(50) 부녀회장은 "이러한 휴양형 마을만들기 사업들을 키워서 출향인사들이 돌아와 살아갈 수 있는 일자리들을 더욱 더 만들어 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조상 대대로 살아온 사람들이 비율로 볼 때 점점 줄어드는 현실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일자리와 관련해 강철호(67) 목장조합장은 "27만평에 달하는 마을 목장이 산록도로 위에 있어 어떠한 개발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휴양자원으로 마을회가 활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보존이라는 가치의 중요성을 인정하지만 실질적으로 마을주민들이 일자리를 창출 할 수 있는 방향을 정책적으로 개발해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마을주민들의 발전 의지는 행정적으로 묶여 있고, 외부 자본들은 들어와서 화려하게 사업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괴감으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현실적 개탄이었다.
장독대와 경운기가 공존하는 농가마당이 유수암리의 현재를 보여준다.
유수암리는 제주도로 밀려드는 외부유입인구와 조상 대대로 마을공동체를 이루며 살아온 사람들이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 것인지 보여주는 마을이다. 분명한 것은 지금의 모습과 현상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미래상은 분명 비극적일것이다.
30년 뒤, 110세 되는 강충희(80) 어르신이 꿈꾸는 유수암리는 어떤 모습일까. "고색찬연한 풍광과 샘물, 연못이 어우러진 하나의 정원과도 같은 마을이 되어있을 것이외다." 혹시 30년 전에 대한 회상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