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경실칼럼]인생은 타이밍의 예술

[고경실칼럼]인생은 타이밍의 예술
인문학에 길을 묻다<18>
  • 입력 : 2015. 12.29(화) 15:38
  • 뉴미디어부 기자 hl@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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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빛의 위대함을 잃지 않는 태양 주위를 도는 지구가 그 반 쯤 돌았을 때 우리는 깊은 암흑 속에서 영혼의 야영을 즐긴다. 요즈음에는 조그만 뒤척거림에도 잠에서 깨어나는 예민함으로 노정하고 있다. 그만큼 시간에 반응하는 집중도가 높아서 그런 건지 아니면 지나는 순간이 아쉬워서 그런지 모르겠다.

 내가 청년이 되었을 때 한참 역사의 중심에 있었던 분들이 그 역할을 다하고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신한국에 기치를 높이 들었던 김영삼 전 대통령, 의회주의의 모범을 보여주었다던 이만섭 전 국회의장이 그런 분들이다.

 中을 완성시켜려했다가 작은 향기 남기고 떠나간 사람들

 그뿐만 아니다. 나를 가르쳤던 스승님, 나를 낳아서 기르셨던 부모님, 형제, 친구, 가수, 배우 등등 같은 시간 속에서 중(中)을 완성시키려했던 사람들이 이제 작은 향기를 남기고 그렇게 떠나고 있다. 여기서 中(중)이라함은 중용에 나와 있는 中(중)을 의미하며 우주가 품고 있는 하나님의 뜻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시(時)간을 만나서 세상에 몸을 나타내고 인간들의 희노애락(喜怒哀樂)으로 실현되어지는 모습을 화(和)라 풀이하고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시간이야말로 흔히들 무정하다고 하지만 최고의 예술이라 하는 것이다.

 평범한 인간들이 보는 가치에서 정상적 수준을 넘어설 때 우리는 이를 예술이라 한다. 지극함에 끝에는 예술이란 세계가 존재한다.

 필자도 직업 공직생활 40년을 마감했다. 강물처럼 많은 사람들과 또는 사연들과 인연 맺으면서 매일같이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구현함으로서 덕을 발현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 속에서 살아왔다. 때로는 보람차고 자긍심을 느끼는 순간이 있었는가 하면 때로는 한없는 좌절과 슬픔과 아픔을 혼자 다 떠안은 사람처럼 살아가는 날도 있었다. 그러나 좀 더 노력하지 못하고 지혜가 다하지 못함을 스스로 질책하면서 몸에 진땀을 흘리는 순간들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어떤이에게는 희망을

 어떤이에게는 슬픔을

 어떤이에게는 아픔을

 어떤이에게는 미움을

 어떤이에게는 사랑을 나누면서 잘했니, 못했니 중얼대다 보니 어느덧 무대에서 내려오라는 감독관의 손짓이 보인 것이다. 이것이 시간이다.

 눈에 보이는 순간들은 역사로 남아있고 눈에 보이지 않은 시간들은 흐름이 되고 자연이 되어 공간속을 유희하는 방랑자가 되고 있을 것이다.

  40년 공직생활 마감..유희하는 방랑자로

 중용 제2장 시중(時中)장에는 君子之中庸也 君子而時(군자지중용야 군자이시)즉, 군자가 중용을 행함은 군자답게 시간을 맞추어 우주 속에 진리를 구현한다는 말이 있다. 하늘의 뜻을 구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시간이란 메시지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고 내가 이익이 되거나 손해를 본다는 측면이 아니라 우주의 섭리라는 차원에서 받아들이고 실행한다는 것이다.

 지금 21세기 초엽에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해야만 할 것인가. 나 자신의 삶도 중요하겠지만 인류문화유산이란 관점에서 볼 때 공동체가 구현하는 유무형의 문명은 훗날 이 시대를 살아냈던 '멋'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공자는 황야를 누비면서 천하의 많은 정치지도자들에게 자신을 기용해줄 것을 희망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외쳤다. 때때로 배운 것을 적시에 구현해야 함을, 당시 지도자는 물론이고 2500백년이 지난 후세에까지 그 뜻을 알리는 것이었다.

 부지런히 배우고 익힌 후 그 시기에 맞게 자신이 공부한 도의 이치를 구현한다면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뜻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배우고 익히는 것 속에 즐거움이 있다고 축소해버리는 경우도 있다.

 
지금 제주특별자치도에서는 그렇게 오랫동안 소망하던 제2공항 건설이 큰 이슈가 되고 있다. 제2공항의 건설 시기가 임박하니 온갖 이해관계에 따라 혹은 저마다의 논리에 따라 찬성과 반대가 부지기수이다.

 단지 이 문제에 국한되지 않아도 대다수 사회 이슈들이 그런 모습으로 의견이 나누어지고 갈등하고 그러면서 시간을 허비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시간을 놓치고는 뒤늦은 후회를 하게 된다. 좁게 보면 각각의 개인에게서도 이런 모습들은 흔하다.

 하늘은 기회를 주었는데 우리는 그 뜻을 개인의 욕심과 결부지어 혼돈을 자초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이 나라가 그러하고 이 지구촌이 그러할 수 있는 것이다. 단지 물질문명이나 과학문명의 발전에 속한 일들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혹자는 이런 저런 이유가 있으니 천천히 걸어가면 좋아질 것이라고 한다. 물론 가능성은 열려있다.

 그러나 그러다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래서 예술적 가치를 함축할 수 있는 작품이 그냥 평범한 작품으로 전락되어 버리는 경우가 있다. 필자 역시 공직40년 세월을 돌이켜보면서 나와 인연 맺었던 이들이 있었기에 나름에 작은 인생이나마 구현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분들에게 깊이 감사하다는 생각을 한다. 한편으로는 그 시간에 탁월함을 발휘하지 못함을 미안하다 생각을 해본다. 또한 나로 인해 마음에 아픔을 느꼈을 분들에게는 깊은 사과를 드리고 싶다.

 지금도 길거리를 걷다보면 나도 모르게 미물들의 생명을 앗아가는 경우도 있다. 이것 또한 미물과 시간의 만남에서 오는 우주 섭리의 단면이기도 하다.

 자신도 모르게 삶속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가치의 차이에서 발생했던 불통의 이야기들이 시간을 거슬러보면 나의 좁은 식견이나 지혜가 없음에서 출발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타이밍이 나에게 예술이란 점을 말이나 글로써는 알지만 온몸으로 절절하게 느끼지 못하는 몸치가 되어 하나님의 뜻임을 온몸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음에 아쉬움이 어린다.

 인생은 시간의 예술..지혜의 눈이 확연함을 느끼지 못할 뿐

 백가쟁명으로 세상은 다양한 가치에 대해 가지치기를 하거나 군살을 붙이기도 한다. 모두에게 잠재해있는 하나님의 뜻에 시간이란 중재자를 만나 희노애락으로 귀결되어진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그래서 인생은 시간의 예술이라 했음을 확연히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어느 날 소복 입은 누이가 국화 옆에 서서 저 멀리 흘러가는 구름자락을 바라보며 미소 짓 듯이 시간은 인간들의 삶의 순환을 나의 몸과 영혼에 자리 메김 하지만 나의 밝지 못한 지혜의 눈이 그 확연함을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 자체의 아름다움 속에 깊은 사념에 빠져 시간의 지극함을 관조해 보는 순간이다.<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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