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조릿대 현장을 가다
누군가는 한라산을 점령했다고 말한다. 백록담 턱밑까지 번진 제주조릿대(조릿대)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 속도도 무섭다. 30여년 만에 한라산 전역으로 뿌리를 뻗었다.
문제는 조릿대의 강한 번식력이 한라산의 종 다양성을 흔들 수 있다는 것이다. 한라산이 조릿대공원이 되면 국립공원에서 제외될 수 있다는 환경부의 경고음은 이러한 위기의식과 맞닿아 있다.
한라산 특별취재팀은 조릿대 확산 실태를 가까이에서 들여다보기로 했다. 지난 4일 어리목 탐방안내소에서 시작해 윗세오름을 거쳐 영실로 내려오는 코스로 한라산을 올랐다. 세계유산·한라산연구원의 전문가들도 동행했다.
본보 취재진과 전문가로 구성된 한라산 특별취재팀이 윗세오름에서 영실로 내려오는 등산로에서 시로미 자생 상황을 확인하고 있다. 조릿대를 피해 바위 위에 붙어 자라는 시로미 사이로 제주조릿대와 온대성 풀이 기다랗게 올라온 모습이 눈에 띈다. 강경민기자
▶어리목부터 백록담 턱밑까지= 여전한 추위에 앙상한 뼈대를 드러낸 나무 아래로 조릿대가 지천이었다. 어리목코스에 들어서자마자 무릎 높이의 조릿대가 등산로를 에워쌌다. 길고 둥그런 푸른 잎에 주변이 하앟게 센 '제주조릿대'다. 볏과 식물로 우리나라에선 한라산에서만 자란다.
경사가 가파른 곳에서도 조릿대는 허리를 곧추세웠다. 금방이라도 앞으로 쓸릴 것만 같은 지반을 꽉 잡고 있는 모양이었다. 조릿대가 토양 침식을 막는 역할을 하는 셈이다. 조릿대 확산 문제를 단순히 '제거'로 풀어선 안 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이러한 순기능 때문이다.
그러나 조릿대의 거센 번식 속도는 한라산 생물종 다양성의 위기 요인이 되고 있다. 세계유산·한라산연구원에 따르면 조릿대는 해발 500m에서 백록담 화구벽 밑 1900m까지 이미 세력을 넓혔다. 취재팀에게도 이 같은 현상은 또렷하게 들어왔다. 해발이 높아져도 등산로 인근에서 조릿대를 쉽게 관찰할 수 있다는 점은 윗세오름대피소(해발 1700m)에 이를 때까지 크게 다르지 않았다. 30여 년 전만 해도 조릿대는 해발 600~1400m에 듬성듬성 분포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지구온난화로 기온이 높아지고 1980년대 중반부터 한라산국립공원 내 방목이 금지되는 상황을 타고 그 세력을 더 빠르게 넓히고 있다.
영실지역 구상나무림에서도 나무 밑동을 감싸듯이 자라는 조릿대를 확인할 수 있다. 강경민기자
특별취재팀 어리목~영실 구간 조릿대 확산 실태 확인토양 침식 등 순기능에도 번식력 강해 종 다양성 위협시로미·털진달래 등 사라질 수도… 관리 방안 과제로
▶조릿대에 밀려나는 시로미= 조릿대는 땅을 단단히 움켜쥐고 자생지를 늘리고 있다. 한라산의 희귀·특산식물 등의 설 자리가 좁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조릿대의 확산이 생물종 다양성의 큰 위기로 여겨지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한라산에는 우리나라 총 식물종 수(4000여종)의 절반에 달하는 2000여종이 자생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한라산 특산식물인 시로미도 조릿대에 밀려나고 있다. 시로미는 러시아 캄차카반도 등에 널리 분포하는 극지고산식물로 한반도에선 백두산과 한라산에만 자란다.
취재팀이 윗세오름에서 영실로 내려오는 등산로 인근에서 확인한 시로미는 바위에 붙어 자라고 있었다. 세계유산·한라산연구원 고정군 생물권지질공원연구과장은 이를 두고 "시로미의 생존전략"이라고 했다. 높이가 10~20㎝ 내외인 시로미가 자신보다 웃자라며 생존을 위협하는 조릿대를 피해 바위 위에 토양을 만들어 자라고 있다는 얘기다.
이러한 생존전략에도 시로미가 조릿대를 피해 살아남을 가능성은 낮을 것으로 점쳐진다. 조릿대의 번식력이 워낙 강한 데다 한라산의 기후가 시로미가 살기에 적합하지 않은 쪽으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바위 위에 뭉쳐있는 시로미 사이로 조릿대와 온대성 풀이 기다랗게 올라온 모습은 조만간 시로미가 한라산에서 사라질 수 있다는 경고를 보내는 듯했다.
한라산 선작지왓 일대에 번진 조릿대. 털진달래, 산철쭉 등 진달래과의 낙엽활엽관목이 군락을 이룬 이 지역은 조릿대 밀도가 높아 종 다양성 감소가 우려되고 있다. 강경민기자
▶조릿대와 생물종 다양성= 조릿대는 한라산 선작지왓, 만세동산 등에 더 빽빽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어리목 일대 조릿대보다 키가 작고 잎이 좁았지만 서로의 몸을 단단히 밀착했다. 이 지역은 털진달래 등 진달래과의 낙엽활엽관목이 군락을 이룬 곳이다. 한라산연구소(현 세계유산·한라산연구원)의 2002년 조사에서도 한라산 관목림 지역 조릿대 줄기 수가 ㎡ 당 평균 2400개로 거문오름, 관음사와 같은 낙엽활엽수림(㎡ 당 170개)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확인됐다.
조릿대의 밀도 증가는 종 다양성 감소에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우려할 만하다. 해마다 봄이면 한라산을 분홍빛으로 물들이는 털진달래가 사라질 수 있다는 예측도 나온다. 한라산 영실 일대 털진달래 꽃눈 수가 최근 3년 간 감소한 이유는 쇠퇴기에 접어든 개체가 많기 때문인데, 조릿대 번식이 거세면 어린 나무가 뿌리를 내리지 못해 결국엔 모든 진달래가 쇠퇴기에 접어들 거라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기도 했다. 이는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91호인 한라산 선작지왓의 털진달래가 만개하는 경관이 언젠가 사라질 수 있다는 일종의 암시이기도 하다.
취재팀은 영실지역 구상나무 숲에서도 나무 밑동을 감싸듯 자란 조릿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구상나무 상당수가 거멓게 말라있는 것과 대조를 이뤘다. 구상나무림이 쇠퇴하는 원인으로도 자연 재해, 기후 변화와 함께 조릿대 번식이 거론된다. 조릿대가 지반을 뒤덮어 구상나무의 어린 나무 발생을 억제할 수 있는 탓이다.
그러나 조릿대를 베어내는 것만으로 구상나무를 보존할 수 없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구상나무의 경우 숲 가장자리에서 어린 나무를 만들어 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방식으로 숲을 유지하고 있어, 이에 맞는 보존 전략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수천여개의 식물종이 얽히고설켜 하나의 생태계를 이루는 한라산이기에, 조릿대를 어떻게 관리할 지가 더 풀기 어려운 문제로 남고 있다. <특별취재팀=강시영 선임기자> <강경민·김지은·김희동천·채해원·강경태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