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시작하며]헌화(獻花)

[하루를시작하며]헌화(獻花)
  • 입력 : 2016. 04.06(수) 00:00
  • 편집부 기자 sua@ihalla.com
  • 글자크기
  • 글자크기
죽음처럼 적막한 긴 겨울을 견디고 다시 힘겹게 생명을 틔워내는 봄. 그래서 봄은 찬란하고 거리는 오색영롱하다. 빈가지만 무성한 마른 나무껍질 속에서 어떤 간절함으로 추위를 이겨냈기에 그토록 화려하게 피어날 수 있는지, 매번 돌아오는 봄은 늘 새롭고 신비롭다.

겨우내 움츠렸던 사람들도 제각기 사랑하는 사람들의 손을 잡고 거리로 나와 꽃비를 맞는 계절. 힘든 외길을 걷고 있는 사람은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며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더욱더 사랑하며 살 수 있기를 기원하고, 미래가 막막한 사람들은 연약하지만 아름다운 꽃잎을 보며 '다 잘 될 거야' 주문을 걸기도 하며, 상처받은 사람들은 따뜻한 햇살 아래에서 아픈 몸을 녹이듯 '괜찮아……. 괜찮아.'를 되새기기도 하는, 그래서 봄은 찰나이지만 치유의 계절일지도 모른다.

지난 겨울, 몸 속에 찾아온 불청객을 끝내 달래지 못하고 아버지가 홀로 먼 길을 떠나셨다. 불청객에게 자리를 내어 주어 병든 몸은 흡사 앙상한 겨울나무 같았다. 푸르렀던 지난 시절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투박한 나무껍질 같은 빈 몸만이 힘겹게 하루하루 생을 붙들고 있었다. 때로는 짜증을 내고 때로는 따뜻하게 두 뺨을 어루만져주기도 하고 때로는 활짝 웃기도 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겨울이 가고 봄이 오듯이 아픔을 잘 견딘 아버지의 몸에서도 꽃이 피어나듯 봄이 올 거라 믿고 싶었다. 아버지의 몸은 끝내 봄을 맞이하지 못했지만 계절은 어느새 봄에 당도하였다. 영혼이 떠난 육신이 그 어디에도 봉인되어지는 걸 원치 않으셨던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유골은 양지바른 산기슭에 뿌렸다. 빈 가지 사이로 시린 바람만이 오가고 바스락 바스락 마른 나뭇잎만이 고요한 겨울 산의 정막을 깨우던 그곳에도 지금쯤 여린 잎들과 형형색색 꽃들로 활기를 찾았을 것이다.

침대 위에서 아버지의 소망은 참으로 소박했다. 방어 철을 맞이한 딸이 살고 있는 제주도에서 함께 싱싱한 방어회를 먹는 것,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와 딸과 예전처럼 낚시하러 가는 것, 꽃 피는 봄이 오면 아내와 손잡고 올레길을 걷는 것이었다. 박범신 소설 '주름'에서 작가는 '과실 속에 씨가 있듯이, 태어날 때 우리는 생성과 소멸, 탄생과 죽음이라는 2개의 씨앗을 우리들 육체의 심지에 박고 태어난다. 생성과 소멸은 경계 없는 동숙자이다.'라고 했다. 죽음은 우리가 세상에 나오는 그 순간부터 늘 등 뒤에 있다. 허나, 죽음을 멀고 먼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우리 안에 내재되어있는 당연한 순리로 인정하고 삶의 정면을 바라보면 눈앞에 보이는 소소한 일상은 더없이 소중하게 다가온다. 그렇기에 죽음이 가장 가까이 다가왔을 때 아버지의 소망이 극히 소박할 수 있었고, 가장 삭막한 겨울이 지난 후에 가장 찬란한 계절이 다가오는 이유이지 않을까.

사방에 유채꽃이며 벚꽃이 흐드러지는 눈부신 봄날,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4월은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아픈 달이다. 3일·16일·19일…, 여기저기 향냄새가 담을 타고 퍼질 것이며 올해도 어김없이 붉게 피어나는 꽃잎 따라 가슴의 피멍도 함께 피어날 많은 사람들이 있다.

봄에 생을 시작하여 겨울에 먼 길 떠난 아버지를 기억하며 아프게 꽃을 바라보다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찰나같이 피고 지는 이 짧은 봄날의 꽃은,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이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짧은 위안을 담은 헌화(獻花)이며 남겨진 사람들이 아직 잊지 않았노라고 그리움을 가득 담아 보내는 헌화(獻花)가 아닐까 하는…. <김윤미 서귀포시 귀촌인>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7698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