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은 도둑처럼 슬그머니 갑자기 오는 것"
"노년은 도둑처럼 슬그머니 갑자기 온다. 인생사를 통하여 노년처럼 뜻밖의 일은 없다."
울림이 있게 늙어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우리 현대사의 비극과 이면을 올곧게 새기면 독자에게 깊은 울림과 감동을 전하는 소설가 현기영(75)의 산문집 '소설가는 늙지 않는다'가 출간됐다.
이 책은 제주에서 태어나 올해로 등단 41년이 된 대작가의 회고록이자 늙음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다.
노작가는 이제 TV 드라마를 보고도 눈물을 글썽인다. 눈시울도 입꼬리도 아래로 처졌다. 코 아래로, 양쪽 입꼬리 아래로 여덟팔자의 금이 새겨졌다. '순이 삼촌'으로 제주4·3사건을 세상에 널리 알리며, 이후 소설로 시대의 이념문제를 정면으로 끌어냈던 대작가가 접하는 노년이다.
이렇게 소설가는 '도둑처럼 슬그머니 갑자기'와버린 노년이 '인생사에서 가장 뜻밖의 일'이라고 하면서도, 더는 노년을 겁내지 않는다. 그래선지 소설가의 노년은 아름답다. "한 해를 마감하는 저 들판이 아름답듯이 인생의 노년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노년을 갑자기 놀랍게, 두렵게, 마감하는 게 아니라 아름다운 모습으로 서서히 사라져 가는 것이다"라고 전한다.
이 책은 세번째 산문집이지만 14년만이다. 2002년부터 2016년까지 틈틈이 써오고 발표해온 산문 37편을 묶었다. 오랜 시간 삶의 비극을 그대로 옮기려고 노력했던 소설가는 말한다. "소설가는 어떠한 절망 속에서도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독자에게 말해야 한다"고. 이 책에는 또 늙음을 접하면서 오는 인간으로서의, 소설가로서의 슬픔, 상실감과 또 그것을 받아들이며 생기는 변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작가는 "노경(老境)에 접어들면서 이전과는 좀 다른 삶을 꿈꾸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작가는 노경에서 누릴 수 있는 즐거움들이 적지 않지만 그중 제일 큰 것은 '포기하는 즐거움'이라고 말한다. 욕망의 크기를 줄이는 것이고 포기하는 대신 얻는 것은 '자유'이다. 소설가는 말한다. "얼굴은 주름 잡혔지만 심장만은 주름살이 생기지 않는 그러한 자유로운 삶을 꿈꾼다"고. 울림이 있게 늙어간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민족문학의 대표적인 작가로 꼽히는 작가는 서울대 영어교육과를 졸업한 뒤 20여년간 교직에 몸담았다. 197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아버지'가 당선되면서 문단에 나왔다. 제5회 신동엽창작기금, 제5회 만해문학상, 제2회 오영수문학상을 수상하고 1999년 '지상에 숟가락 하나'로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했다. 사단법인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과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을 역임했다. 다산북스. 1만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