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에서 다랑쉬오름과 용눈이오름 방향으로 눈길을 돌리면 온통 초록빛 풍경이 펼쳐진다(위). 상도리 마을회관 옥상에서 바라본 고즈넉한 전경(아래).
공무원 없는 집안 없다며 자식 농사에 자부심 즐기는 관광 변모 추세 맞춰 목장 활용에 관심 "노인들 이용 많은 게이트볼장 비가림시설 시급"
아직도 제주의 옛 정취가 느껴지는 마을이다. 정주 공간에서 벗어나 용눈이 오름 방향으로 걸어 올라가면서 "그래, 여기 제주도가 남아 있어!"를 연발하게 된다. 조금 높은 지대를 만나면 멀리 일출봉과 우도, 다랑쉬 오름을 위시한 동부지역 '오름 파노라마'가 눈을 호강시킨다. 거친 돌무더기와 나무들을 뽑아내 밭을 일군 형태가 고스란히 조상들의 피땀을 표현하고 있다.
구좌읍 동남쪽 중산간 마을에 속한다. 동쪽은 종달리, 서쪽은 세화리, 남쪽은 성산읍 수산리, 북쪽은 역사적으로 원래 한 마을이었던 하도리가 있다. 이런 쟁쟁한 마을 사이에서 양반촌이라는 소리를 들으려 마을공동체는 부단히 노력했던 모양이다. 마을 분위기 자체가 유교적 전통에 입각하여 입신양명의 인생관을 전수하고 있었기에 학문을 연마해 관직에 나가는 일을 중시하였다. '공무원 없는 집안이 없다.'는 말을 기쁜 마음으로 들으며 자식 농사에 더욱 정진하였던 사람들. 출세하여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많아서일까. 마을 인구는 400명 정도다. 마을 면적에 비해 주민수가 적다는 말을 상도리 어르신들의 입에서 자주 듣게 되는 것은 농경사회에서 느끼던 마을 모습을 자주 회상하기 때문일 것이다.
마을 남쪽 농로를 따라 걸어가다 보면 제주의 밭담이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오창은(80) 노인회장이 전하는 설촌의 역사는 이렇다. "지금부터 500여 년 전, 김여수라는 분이 처음 이 곳에 들어와 봉천수 물통을 근거지로 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 분이 이루어 놓은 물통을 '여수물'이라고 하지요. 첫 거주지역은 '기러막동산(현재 장덕거리)' '종나물' 부근이었다고 합니다. 상도리(上道里)라는 명칭은 하도리와 한 마을이던 시절에 '도의여'라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19세기 중반에와서 웃도의, 알도의, 벨방마을로 나눠 부르게 되었는데 20세기 초에 벨방마을이 알도의에 통합되면서 '道衣'에서 '衣'가 탈락되어 상도, 하도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원래 바닷가도 좋았던 마을이라고 했다. 양반촌이라는 자존심이 그 바닷가를 다른 마을에 줘버리게 된 것. 상도리 영역 바닷가에 송장이 밀려오면 '그런 일을 어찌 양반이 할 수 있겠느냐.'며 옆 마을에서 치우고 바다도 가져가게 하다 보니 바다가 없어졌다고 한다. 지금은 해녀박물관 아래 바닷가 50m 정도가 퇴화된 꼬리처럼 남아있다. 필자는 바다가 없는 중산간 마을로 알고 있었지만 상도리에도 엄연하게 바다가 있었다. 양반의식이 발생시킨 이야기 속에서 과연 상도리가 양반촌의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는 반증을 얻게 된다.
바다를 등한시 했다면 축산에는 관심이 많았다. 용눈이오름을 돌아가면서 마을 목장을 형성하고 집집마다 소를 키우지 않는 곳이 없었다고 한다. 15만 평에 달하는 마을목장에 축산계원들이 지금도 가축을 키우고 있다.
정태훈 이장
정태훈(64) 이장이 밝히는 마을의 당면 과제와 숙원사업은 이렇다. "제주의 농촌 현실이 대부분 그렇듯이 노인인구가 상대적으로 많습니다. 맑은 날은 밭에 나가지만 비가 오는 날에는 노인회관에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야 하는데 게이트볼장에 비가림 시설을 할 수 없어서 안타까움이 많습니다. 행정 당국에서는 건폐율 적용 때문에 안된다고 하고 있으니 답답한 현실이지요. 행정의 일관성도 이해가 되지만 공익적인 요인이 분명함에도 너무 경직된 일처리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희망적인 현안은 마을 목장 중 일부를 제주레일바이크에 임대해줘서 임대료를 받고 있습니다. 레일바이크 사업이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많고 발전하고 있다고 하니, 마을회에서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저 관광지 주변에서 수익사업을 할 수 있는 방안을 찾고 있습니다." 마을 목장 부지를 가지고 관광사업을 유치하여 임대료를 받는 형식으로 관계를 형성한 것은 참으로 현명한 일이었다. 마을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자산을 그대로 유지하고 파급력을 관찰하고자 하는 신중한 자세도 엿보이고. 만 오천 평을 임대하고도 13만 여 평의 용눈이 오름 주변 마을 목장이 있다. 이를 활용하여 레일바이크 사업과 윈윈할 수 있는 사업을 찾고 있는 것이다. 명승지 경관 중심의 관광에서 즐기는 관광으로 변화하고 있는 상황을 간파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마을 발전의 새로운 전기로 삼은 것은 전략적으로 건강한 선택이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밭들과 함께 조화를 이루는 취락구조가 아름다운 정취를 자아낸다.
홍영애(55) 부녀회장에게 '마을 발전에 투자할 100억이 생기면 무슨 사업을 하고 싶으냐?'고 물었다. "30년 가까이 당근 농사를 하고 있습니다. 다른 작목에 비해 토질도 맞고 경쟁력도 있지요. 제조업 공장을 만들어서 당근의 생산성을 더욱 증대시키고 부녀회원들의 일자리도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농촌여성의 살림 감각이 그대로 드러나는 알뜰한 꿈이었다. 가격보장에 힘겨운 날들을 경험하고 있기에 안정적인 생업 환경을 확보하고자 하는 뜻일 것이다.
이태길(41) 청년회장이 확신하는 71세가 되는 30년 뒤, 상도리의 모습을 그려달라고 했다. "공동주택이 많이 지어져서 인구가 대폭적으로 증가해 있을 것입니다. 상도초등학교가 생겨 있을 것이고, 용눈이 오름 주변 마을 목장부지가 엄청난 관광지로 변모해 있을 것입니다. 밖에 나가서 일자리를 찾던 청년들이 대부분 상도리 안에서 고소득을 올리는 생업에 전념하고 있을 것입니다."
용눈이오름 인근 상도리 마을목장 일부를 임대해 운영중인 제주레일바이크.
상도리를 다른 마을 청년들이 물려받을 수 없는 것처럼, 꿈도 대신 누가 꿔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꿈 많던 소년이 자라서 청년이 되었다. 청년은 다시 꿈을 꾼다. 자랑스러운 노년의 모습을 위하여 오늘을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다. 상도리의 미래는 이런 당찬 포부 속에서 씩씩하게 성장하고 있는 것. 양반마을 자부심이 새로운 형태의 산업 환경과 시대정신 속에서 그 잠재력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사람농사에 강한 상도리가 그 인적자원까지 가세하면 놀라운 성과가 일어나리라는 것은 자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