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금성(錦城)이라는 명칭에는 남쪽의 높은 동산지형이 성처럼 둘러쳐서 포근한 느낌을 주고 비단을 짜서 수출하며 살았다는 옛이야기가 녹아있다. 섬 제주의 유서 깊은 마을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곳이다. 탐라시대 전기 석축 유적이 발견될 정도로 오래전부터 이곳은 마을이 형성돼 번창하던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을 이름에 비단 금(錦)이 들어간 이유가 궁금해 연원을 살펴보니 19세기 말엽에 금성리라는 마을 명칭을 정하던 시절, 구체적으로 1830년대에 농가부업으로 양잠을 해 비단을 만들었기 때문에 이를 강조하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한다.
조상들의 눈에 상류의 냇가 모습이 삼솥발 형상과 유사하다고 해 붙여진 이름 정자정천(鼎字亭川)을 지금은 금성천으로 편하게 부른다. 이 냇가를 경계로 서쪽 귀덕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애월읍과 한림읍이 금성천에서 나뉜다는 의미다. 마을 동쪽은 곽지리, 남쪽은 봉성리와 인접해 있다.

문기준 이장
옛날 부르던 고유 명칭은 '모슬개' '모실개'다. 이는 설촌의 원류가 금성천 하구를 중심으로 모여 살았다는 의미. 그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삼한시대부터 한반도와 중국을 왕래하는 선박들이 이 마을 바닷가를 이용하였기에 분묘유적이라고 하는 타임캡슐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그 평화롭던 해양교역의 중심마을이 삼별초가 입도하고 서기 1237년 이를 토벌한 여몽연합군이 평정을 하고 그냥 돌아간 것이 아니라 원나라가 직할령으로 예속시켜 90년 넘게 통치하면서 금성리와 주변 지역은 경제적, 군사적 요충지로 자리 잡게 된다. 문헌은 왜곡이 가능할지 모르지만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지명은 명확한 신빙성을 가진다. 지명 이름이 '관사지'(금성리 446번지)는 1930년대까지는 주춧돌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의미하는 바, 원나라 지배세력 관료들이 행정관청으로 쓰던 중요 지역이었다는 것이다. 하천 하구를 해양전진기지로 쓸 수 있었기에 선택된 여건이라고 파악하는 것이 보편적 관점이겠지만 성벽과도 같은 지형이 있어서 해적이나 왜구들이 침입해 왔을 때, 백성들이 기민하게 피해 진을 치고 이를 격퇴할 수 있는 천혜의 요새 기능이 있는 것이다. 마을 이름에 성(城)이 들어간 것은 그냥 우연으로 치부하기에는 그 현실적 쓰임과 생존을 위한 선택의 역사가 그대로 '비단처럼 귀한 성'을 보유하고 있는 마을이 된다. 그러한 위상은 위치적 강점 못지않은 배경이 숨어 있었다. 화산섬이라는 척박함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의 토질은 그 농업생산성이 여타 지역의 몇 곱절 이상 되니 자연스럽게 인구유입에 따른 조세와 노역 여건이 마련될 수 있었던 것. 결국 땅의 힘이 사람과 역사를 움직였다는 뜻이 된다. 그 기름진 옥토에서 지금도 강한 농업경쟁력이 발휘되고 있다. 주요 작물은 양배추, 브로콜리, 양파 등 품질로 승부를 거는 농민들의 터전이다.
문기준 이장에게 금성리가 보유하고 있는 가장 큰 자긍심을 묻자 자신감 있게 "애향청년"이라고 대답했다. 어느 지역의 청년회보다도 그 결속력과 마을공동체에 대한 열정적 헌신은 결코 뒤지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마을 안에 청년회 건물이 따로 있는 곳은 규모가 큰 마을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금성리청년회 현판이 걸린 단층 건물이 보여주는 상징적 의미는 모든 것을 함축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농촌 노령화라고 하는 시대적 현상 속에서 자신감 있게 청년회 활동을 마을의 가장 큰 자부심으로 내세울 수 있다는 것은 강인한 체력을 가진 일꾼을 바라보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마을공동체가 처한 어떠한 난관도 청년정신아라고 하는 진취성과 돌파력을 가지고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라고 이해된다. 깊은 우애를 가지고 마을발전 방향과 실천적 행동을 함께 하고 있는 그 모습 자체로 미래는 밝다.
작지만 강한 농촌이라는 표현과 가장 어울리는 마을이다. 농경지에서 도자기 파편이 흔하게 출토되는 유서 깊은 마을, 금성천과 해변, 그리고 잣동산 지대를 이어주는 포근하고 아름다운 동선이 보존된 마을. <시각예술가>
잣동산질 오르막<연필소묘 79㎝×35㎝>
흑백사진 이전의 모습을 느끼고자 연필소묘로 이 오르막길 돌담과 길을 그렸다. 해발고도 관점에서 크게 두 개의 높낮이를 가진 마을이다. 이 오르막을 올라서 만나게 되는 높은 지대 농경지와 내려가면 만나게 되는 정주 공간들. 쉽게 동산이라고 표현해 써왔지만 밑에서 올려다볼 때는 성벽이 이어진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한 지형의 한 곳에 길을 내서 생활터전으로 삼았던 조상들의 선택. 저 가파른 경사가 얼마나 많은 애환을 생성시켰을까? 자동차가 없던 시절, 등짐을 지고 경사각이 45도 정도 되는 길을 올라가야 하던 사람들의 마음을 떠올리며 그렸다. 마을 어르신들이 전하는 기억에 의하면 달구지를 끌고 올라가던 소들도 거품 물며 골병들었다는 고개다. 사람은 오죽 힘들었을까? 숙명과도 같은 생존의 루트다. 할머니 할아버지도 온전하게 받아들이며 등짐을 지고 오르고 내렸으며, 어머니 아버지도 그렇게 살아왔기에 나도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 살아온 저 오르막길은 어떤 설명으로도 의미를 다 드러낼 수 없을 것이다. 금성리 사람들의 불굴의 기질과 근면 성실이 설촌 이래로 끊임없이 담금질되어온 길. 쌓인 돌담들이 독특하다. 암반을 깬 그대로 커다란 돌에서부터 아주 작은 돌까지 함께 쌓여있다. 자동차가 원활하게 다니도록 경사각을 낮게 만든 흔적을 보여주는 입증 근거가 돌담으로 드러난다. 회화적 리듬감엔 더없이 좋은 소재다. 오르막길 하나에 함축된 마을의 역사 그 질긴 생명력을 그렸다.
어떤 바닷가 건물<수채화 79㎝×35㎝>
금성어촌계 건물이다. 오후의 눈부신 햇살과 짙은 바다색이 건물 뒤편에 펼쳐져 있다. 문제의식을 표현하기 위한 그림이다. 컨테이너 몇 개를 연결해 해녀들과 어부들이 사용할 수 있는 일터 공간으로 쓰고 있는 곳이다. 일부러 컨테이너 세로줄 쇠판 무늬를 빼버렸다. 그러니까 그냥 건물처럼 보인다. 금성포구 옆 매립지 위에 지은 건물이 아니라 올려놓아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의 생존의 터전 위에 스스로 건물을 지을 수 없는 이 나라의 법 때문. 해변 조간대 매립지는 국가소유로 관리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건축물도 지을 수 없다는 것은 마을 주민들이 조상 대대로 살아온 헌법상 행복추구권과 정면으로 충돌된다. 명백한 입법 미비를 이 금성어촌계 컨테이너 그림을 통해 드러내고자 한다. 우여곡절 끝에 어촌계를 복원해낸 불굴의 의지가 행정논리를 우선시하는 법에 의해 고초를 겪고 있는 모습이 안타까워서 그린 것이다.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것이 엄존한다. 다른 마을 바닷가에 있는 해녀들을 위한 멋있는 건물들이며 어촌계 건물들처럼 지어서 당당하게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영위하고 싶어도 법이 발목을 잡는다면 '국민주권시대'를 표방하는 정부가 책임을 다해야 한다. 개인 기업도 아니고 마을공동체가 생업의 활용 공간을 마련할 수 없도록 제약한다는 것은 제주의 역사적 마을공동체정신에 입각해 지탄의 대상이다. 소망을 담고 그렸다. 가까운 어느 날에 법적인 문제가 해결돼 마을 주민들이 지은 어촌계 건물을 다시 그리러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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