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시작하며]폭염(暴炎)

[하루를시작하며]폭염(暴炎)
  • 입력 : 2016. 08.24(수) 00:00
  • 편집부 기자 hl@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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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형, 이웃 마을 한 남자가 재혼을 했는데요, 신부는 육지여자였답니다. 신혼 초기, 한여름 새벽3시에 여자를 깨워 과수원에 가서는 "소독줄 잘 잡으라!"하고, 컴컴한데 농약을 쳤답니다. 덜컥 겁이 난 그 여자는 그길로 떠나버렸다고 하네요.

한낮의 무더위를 피하기 위하여 이곳 감귤농가들은 으레 하는 일인데도 처음 겪는 그 여자는 많이 무서웠던 모양입니다. 컴컴한데 어떻게 농약을 치냐고요? 그냥 감각으로 하는 거지요. 일테면, 한석봉의 어머니가 불을 끄고 떡국을 썰었듯이요. 달인의 경지인 것입니다. 수확 때 비교해보면 밤에 뿌린 거나 낮에 뿌린 거나 품질은 똑같아요.

또 서귀포 친구 K씨는 8월 땡볕에 농약을 치는데, 숨이 콱콱 막히고 정신도 아찔하여 몇 번을 중단하고 싶어도 중단하면 언제 또 어떻게 하나 싶어, 이를 악물고 기어이 농약을 다 친 순간 저절로 "만세!" 소리가 나더랍니다. 눈물이 핑 돌더랍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기분이었대요. 단지 환호와 박수가 없었을 뿐.

또한 이웃동네 어느 형은 부부가 소독을 하는데 하도 더워서 아내가 "00아빠, 좀 쉬었다 합시다"고 사정을 했대요. 그래도 남편은 "저녁에 모임도 있고 하니 빨리 헤영 집이 가게"하면서 강행군했답니다. 한참을 하던 아내가 아무래도 예감이 이상하여 달려가 보니 남편이 쓰러져 있더래요. 서둘러 조치를 취했지만, 영영 깨어나질 못했답니다. 그 "빨리 헤영 집이 가게"가 이승에서의 마지막 말이 되고 말았대요.

이처럼 한여름의 일들이사 정작 그 더위와의 싸움 아닙니까. 특히 소독복을 꽉 껴입고 하는 농약살포는 생사를 넘나드는 그야말로 사투(死鬪)인 것입니다. 문제는 모든 작물이 여름에 왕성히 자란다는데 있습니다. 곡식도 채소도 나무도 열매도 잡초까지도. 그러기에 소독이나 제초작업 등은 어차피 여름에 할 수 밖에요. 결국, 무더위에도 쉴 수 없다는 것, 쉬어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목숨을 걸고 생산해낸 감귤이 생산비를 밑도는 상황에 이를 때, 따서 그냥 땅바닥에 버리는 상황에 이를 때, 아예 따지도 못하고 나무까지 포기하는 상황에 이르고야 말 때 가슴이 미어지는 것입니다.

고품질, 고품질이라고 말들 하지만 그 고품질 생산이 쉽지 않음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노력해도 품종을 앞서 가지 못 한다"며 품종갱신을 줄기차게 외쳐대지만 그 또한 쉽지 않음을 우리는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한창 열리는 귤나무들을 뽑아내어 새 품종을 심는다는 것, 혹은 그 나무들을 잘라서 고접갱신을 한다는 것, 그러려면 최소 2년 동안 소득 없이 살아야 한다는 것, 작은 일이 아니지요. 그래도 일부 선진농가들의 과감한 품종갱신 현장을 보면서 그들이 옛날 '대학나무' 시절의 고소득을 올리는 걸 보면서, 0형, 어떤 희망을 함께 보기도 하는 것입니다.

올림픽 때마다 느끼는 안타까움은 시합 전 매스컴에서 대서특필한 선수는 진다는 것이다. 대문짝만한 사진에다 금메달 0순위니, 따논 당상이니 어쩌고 저쩌고, 오만방정 개나발을 다 불어 논 선수는 기어이 진다는 것이다. 경기를 앞둔 어린 선수의 허파에 바람을 잔뜩 집어넣음으로써 평상심 즉 죽기살기식의 투지를 잃게 만드는 때문이다. 나는 권투선수와 감독을 오래 해봐서 출전선수의 마음을 좀 안다. 정상급의 기량은 백지 한 장 차이다. 조그만 심적인 동요로도 얼마든지 승패는 갈릴 수가 있다. 애초의 그 평상심으로 경기에 임하게 해줘야 한다. 차분히 후회 없는 승부를 펼치게 해줘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니 매스컴이여, 제발 그 저주의 입을 다물라. <강문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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