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를 이끌어온 선각자들](16)송봉규 한림공원 회장

[제주를 이끌어온 선각자들](16)송봉규 한림공원 회장
불모의 땅을 초록 낙원으로… 모래밭에서 기적을 일구다
  • 입력 : 2016. 10.27(목) 00:00
  • 김지은 기자 jieun@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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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모의 땅을 초록 낙원으로 일군 기적을 보여준 송봉규 한림공원 회장은 '노력하는 사람은 하늘이 돕는다'는 신념을 가지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강희만기자

1970년 일본 시찰 뒤 고향에 공원 조성 꿈꿔
버려진 땅 9만평 매입해 야자수 등 뿌리 내려
재암문화재단 설립… 10년 넘게 장학금 지급

40여 년 전만 해도 '버려진 땅'이었다. 그저 모래바람만 휘날렸다. 그랬던 곳에 야자수 씨앗이 뿌리를 내렸다. 푸름은 갈수록 짙어졌고, 이내 거대한 공원을 이뤘다. 한해 100만여명이 찾는다는 제주 대표 관광지 '한림공원' 이야기다.

지난 24일 만난 송봉규(85) 한림공원 회장은 믿음이 컸다고 했다. "고향, 제주에 제일가는 공원을 만들어야겠다"고 시작한 일이 모래밭을 '초록 낙원'으로 바꿔놓았다. 누구도 쉬이 믿지 않았지만 그의 손에서 현실이 됐다.

▶일본서 본 야자수… 한평생의 꿈을 꾸다=1970년 찾은 일본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송 회장의 기억 속 일본은 태평양전쟁 당시 곳곳이 불에 타 잿더미로 변한 모습이었다. 1931년 제주 한림에서 태어났지만 1945년 해방이 되기 전까지 일본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던 그였다. 30년이 채 안 되는 시간의 변화가 무섭고 놀라웠다.

"제주도정자문위원을 맡으면서 1970년 일본으로 시찰을 가게 됐지요. 당시 오사카에서 열린 '엑스포 70' 만국박람회를 둘러봤는데, 천지가 달라져 있었습니다. 큰 호수와 산을 만들고 나무를 심고. 일본정원이 만들어졌는데, 세계 사람들이 두려움을 느낄 정도였죠."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야자수였다. 일본 사카이시의 야자수 길을 제주에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이 미쳤다. 관광 자원으로서의 가치를 내다본 것이다.

마음이 동하니 주저함이 없었다. 일본에서 돌아온 그에겐 야자수를 키우는 법이 담긴 책과 일본 내 공원, 유원지에서 찍은 사진 필름 수 십 여 통이 남았다. "제일가는 공원을 만들자"는 꿈의 시작이었다.

1970년대에 씨앗을 뿌린 야자수는 어느새 하늘 위로 솟을 듯 자라있다.

▶황무지에 뿌리 내린 씨앗=그는 고향 한림에서 꿈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우선 땅이 있어야 했다. 때마침 오현학원이 협재리에 있는 모래밭을 팔려고 경매에 부쳤다. 수차례 경매에도 팔리지 않던 9만평 규모의 땅을 선뜻 사들였다. 1971년 6월의 일이다.

그의 말마따나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은 곳"이었기에 이해 받지 못했다. 송 회장은 "황무지에 무엇을 하겠다고 하니 처음에는 부모도, 마을 사람들도 반대했다"고 말했다.

가는 길도 순탄치 않았다. 사인펜으로 직접 구상도를 그려가며 세운 '한림지구종합관광계획'은 시작부터 벽에 부딪쳤다. 구입한 토지 대부분이 사방림 지구인데다 문화재 보호법, 학교보건법 등의 적용을 받아 개발이 불가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구입한 토지의 일부라도 나무가 자라는 곳으로 만들기로 했다. 빌레(너럭바위)와 가시넝쿨이 뒤덮인 땅을 호미와 낫으로 일구고, 씨앗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트럭 2000대 분량의 흙을 퍼 날라 모래와 섞었다.

야자나무 씨앗이 뿌려진 건, 땅을 사들인 지 1년만이었다. 송 회장은 1972년 4월 소철, 워싱톤야자, 카나리아야자 등의 종자 5만개를 일본에서 수입해 파종했다. 수도 시설도 없던 때라 매일 같이 물을 주는 것조차 애먹었다. 그러나 틀림없이 싹을 틔울 거라는 확신이 컸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발아율이 80%를 넘어섰다. 잘 자란 야자수는 도내 곳곳으로 분양됐고 제주국제공항, 서귀포 중문관광단지 입구에도 뿌리 내렸다. 일본에서 키위 묘목을 수입해 1979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재배에 성공한 것도 송 회장이었다.

한림공원의 명소 중 하나인 협재쌍용굴

그렇게 10년을 보내니 기회는 찾아왔다. 1982년 공원법이 개정되면서 개인도 공원을 조성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해 9월 송 회장은 한림도시공원 조성사업의 허가를 받았다. 관광단지 조성이 속도를 받게 된 셈이다.

▶제주 대표 관광지를 만들다=손님맞이 준비는 차근히 진행돼 왔다. 공원 내부에 있는 협재굴과 쌍용굴의 연결도 그 중 하나다. 송 회장은 1982년 보이지 않게 파묻혔던 쌍용굴을 협재굴과 연결했고, 이듬해 일반에 공개했다.

이어 관람객 휴게시설과 제주의 옛 초가를 복원한 재암민속마을, 아열대식물원, 재암수석관 등이 차례로 문을 열기 시작했다. 공원이 모습을 갖추니 발길이 줄을 이었다. 송 회장은 "당시 제주도 관광지는 삼성혈, 성산일출봉, 천지연폭포, 만장굴, 이 정도였는데 새로운 공원이 생겼다고 하니 사람들이 엄청나게 몰렸다"며 "많이 올 때는 하루에 1만3600명까지 왔다 갔다"고 떠올렸다.

왼쪽부터 재암민속마을, 아열대식물원

이름이 알려진 인사들의 방문도 잇따랐다. 일본의 국민작가인 시바 료타로(1923~1996년)는 자신이 쓴 '탐라기행'에 송 회장과의 만남(1986년)을 이렇게 언급했다.

"그 사람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알 수 있다. 이 사람은 돈벌이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좋아서 하고 있다는 것이 투명하리만큼 잘 보이기 때문이다.."

그가 일군 공원은 누군가에게 동기를 심어주기도 했다. 섬 전체가 해상 식물공원인 거제도 '외도 보타니아'의 꿈도 한림공원에서 비롯됐다. "지금의 외도를 만든 분도 한림공원을 보고 시작했다고 하더군요. (그런 얘기를 들으면) 어려웠지만 잘 해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게 바로 산교육의 장이 아닌가 싶습니다."

왼쪽부터 산야초원, 사파리조류원

송 회장은 10여년째 자신이 설립한 '재암문화재단'을 통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지역 문화 발전에 공헌한 이들에겐 재암문화상을 시상한다. 그동안 모은 돈을 지역 사회에 환원하고 싶다는 뜻이 담겼다. 그의 나이 일흔이 되던 2001년부터 올해 2월까지 지원한 금액이 15억원을 훌쩍 넘어선다.

쉽지 않은 길을 걸었기에 그는 "열심히 하면 하늘이 돕는다"는 말을 굳게 믿는다.

"공원 직원이 저한테 이런 말을 하더군요. 회장님이 나무를 심으면 뒷날 비가 온다고요. 지금의 공원은 물이 제일 귀했던 곳이었는데, 나무를 심으면 때마침 비가 온다는 것이었지요. 협재굴과 쌍용굴을 연결할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새벽에 나가 보니 큰 바위 덩어리가 동굴 바닥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작업할 때 떨어져 사람이 다치기라도 했으면 당장 일을 멈춰야 했을 겁니다. 노력하는 사람은 하늘이 돕는다는 신념을 가지고 열심히 하면 분명 뭐든지 됩니다. 젊은 세대에도 이 말을 꼭 전해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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