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를 이끌어온 선각자들](20) 국민가수 백난아

[제주를 이끌어온 선각자들](20) 국민가수 백난아
"무대가 있는 한, 이 생명 다할 때까지 노래하겠습니다"
  • 입력 : 2016. 11.24(목) 00:00
  • 표성준 기자 sjpyo@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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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5년 제주도여성특별위원회가 펴낸 제주여성사 자료총서 Ⅵ '시대를 앞서 간 제주여성'은 언론·문화·체육 분야 인물 중에서도 가수 백난아를 가장 먼저 소개했다. 그 전까지만 해도 함북 청진 출신으로 알려진 백난아가 제주 출신이라는 사실이 이렇게 알려지면서 그 삶과 업적이 본격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한 시대를 풍미한 그는 한국가요사에 큰 획을 그었으며, 한국대중문화예술의 기틀을 마련한 선각자로 이름을 올리기에 충분하다.

백난아는 생을 마감하기 3년 전인 지난 1989년 1월 자신의 히트곡 53곡을 묶어 '백난아 히트애창곡집'(현대음악출판사)을 발간했다. 이 책에는 작사가 반야월, 작곡가 박시춘, 작곡가 손목인, 작사가 유호 등 한국가요계의 산 증인이었던 원로들이 '축하의 말씀'을 실었다. 그 가운데 손목인의 다음과 같은 글은 백난아의 명성과 인품이 어땠는지를 제대로 알려준다. "백난아! 그대 뜨거운 가슴으로 대중들을 사랑하였으니, 대중들 또한 고운 그대를 영원히 잊지않고 사랑하리라. 언제나 푸른 넋으로 살았고, 언제나 하얀 순정으로 견딘, 그대 백난아!"

불후의 명곡 '찔레꽃'… 한국인 가장 사랑하는 가요 100선
'낭랑 18세' 등 히트곡으로 한국 가요계 독보적인 자리매김
89년 '히트애창곡집' 발간·세 차례 고향 방문공연도 펼쳐


2005년 제주도여성특별위원회가 펴낸 제주여성사 자료총서 Ⅵ '시대를 앞서 간 제주여성'에 소개된 가수 백난아.

백난아의 본명은 오금숙(吳金淑)이다. 1927년 5월 제주시 한림읍 명월리에서 태어난 오금숙은 세 살 되던 해 가족들과 함께 만주에 이주했다. 이후 아홉살 때 함경북도 청진에 정착한 오금숙은 부친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가족들과 함께 청진에서 생활을 이어갔다. 평소 노래를 좋아하던 오금숙은 동덕보통학교 6학년 때인 1940년 빅타레코드사가 주최한 청진 콩쿠르에서 1등을 차지하면서 노래 실력을 알리기 시작했다. 북성여중에 입학한 후에는 콜럼비아레코드사 주최 콩쿠르에서 1등을 하고, 열다섯 살 되던 해에는 태평레코드사의 레코드예술상 회령 대회에서 1등한 데 이어 서울 본선에서도 공동 1등을 차지해 천재성을 발휘했다.

태평레코드사 전속가수로 본격 가수 활동을 시작한 오금숙은 이 때 가수 백년설로부터 백난아(白蘭兒)라는 예명을 얻게 된다. 불후의 명곡 '찔레꽃'을 취입한 것도 이 즈음이다. 이후 한국가요를 취급한 적이 없던 일본 킹레코드사에 발탁돼 일본에서 순회공연을 진행해 톱가수 대접을 받기도 했다. 태평양전쟁 말기에 접어들면서 물자부족 등으로 레코드산업이 전면 중단되는 위기를 맞았지만 백난아는 만주지방까지 공연을 다녔다. 그렇게 광복을 맞이한 후에는 충무로 3가의 일본인 집을 매입해 백난아양재학원을 설립하기도 했다.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 고향/ 언덕 위에 초가삼간 그립습니다. 자주 고름 입에 물고 눈물 젖어/ 이별가를 불러주던 못 잊을 동무야"('찔레꽃' 1절)



백난아가 1989년 1월 자신의 히트곡 53곡을 묶어 발간한 '백난아 히트애창곡집'.

광복 후에는 '찔레꽃'이 다시 유행하면서 큰 인기를 얻게 됐다. 당대 최고의 멋쟁이로 꼽혔던 백난아가 부른 이 노래는 '남쪽나라 내 고향'이나 '초가삼간' 등의 노랫말이 민중의 향수를 자극해 국내는 물론 만주와 중국 등지에서도 실향민들에 의해 널리 애창됐다. 덕분에 태평레코드사는 돈더미에 앉게 됐으며, 백난아도 한국가요계의 독보적 존재로 자리매김하게 됐다고 한다. 이로부터 약 50년이 지난 2006년 '찔레꽃'은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가요 100'선(MBC&갤럽 조사)에 53위로 올랐다. 100선 중 '찔레꽃'보다 오래된 노래는 69위에 오른 '목포의 눈물'이 유일했다.

광복 직후에는 백난아 외에도 급부상한 여가수들이 있었지만 레코딩 가수로서 성공한 이는 백난아가 거의 유일할 만큼 독보적이었다. 이후 럭키레코드에 전속된 백난아는 훗날 제주 출신 후배가수 한서경이 부른 '낭랑 18세' 등 인기곡을 발표하면서 인기를 유지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활동을 이어간 백난아를 목격한 10살의 이미자는 훗날 피난시절 백난아의 공연을 보고 가수가 되겠다는 꿈을 품었다고 했을 만큼 많은 영향을 끼쳤다.

전쟁 후에는 직접 악극단을 조직한 백난아는 1956년 가수생활 15주년을 기념해 전국 순회공연을 시작했다.

백난아가 태어난 것으로 알려진 명월리 백난아 생가터.

남자들도 쉽지 않은 악극단을 운영한 것은 백난아의 여장부 기질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되기도 한다. 한국은 물론 일본 위문 공연 등으로 활동을 이어가던 백난아는 1985년 충무로에 수도예술학원을 설립해 후학들을 양성해 나갔다. 광복 후 충무로에 양재학원을 설립하거나 서울극장 경영에도 관여한 전례가 있는 백난아는 이렇게 여성의 사회 진출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받는다.

백난아는 1957년과 1961년에 이어 1986년에도 고향을 방문해 한림문화관(옛 한림극장)에서 공연을 펼쳤다. 이 때 백난아의 고향 명월리 주민들도 이 공연을 관람했다. 명월리는 오씨 집성촌이기도 하다. '명월리지'는 백난아가 1956년(또는 1957년) 한림 공연에서 자신이 명월인임을 자랑했다고 기록해놓고 있다. 1988년 마지막 앨범 '이별의 술잔'을 취입한 백난아는 1989년 '히트애창곡집'을 발간한 뒤 말년에 제주시내 한 호텔 전속가수로도 활동했다. 그러나 암을 얻은 뒤에는 가족들 곁으로 돌아가 1992년 1월 65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백난아의 고향 한림읍 명월리 주민들이 중심이 돼 설립한 국민가수백난아기념사업회가 세운 '국민가수백난아기념비'.

한림지역 주민들은 지난 2007년 '국민가수백난아기념사업회'(초대회장 오경욱)를 결성해 지금까지도 '백난아 가요제'를 열고 있다. 옛 명월초등학교 앞에 '백난아기념비'와 '찔레꽃기념비'를 세웠으며, 백난아의 발자취를 더듬어 2010년 1월 그의 삶을 기록한 '국민가수 백난아'도 펴냈다. 이 책에 '이 생명 다할 때까지'라는 제목으로 백난아가 1988년 12월에 직접 쓴 글이 소개되고 있다. 이 글은 "아직도 사랑이 많고 아직도 열정이 많습니다. 아직도 그리움이 많고 아직도 할 일이 많습니다. 팬들이 있고 무대가 있는 한, 이 생명 다할 때까지 노래할 것입니다"로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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