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건이 있었다. 세월호 참사, 메르스 사태, 강남역 살인사건,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 최근 최순실-박근혜 게이트까지. 하지만 사건 이후로도 우리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고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희망 없는 희망 고문이 이어지고 삶이 절망으로 바뀌어 가면서 우리는 오직 리셋만을 상상할 수 있게 됐다.
저자 엄기호는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고 여기게 된 지금,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주목한다. 총 3부 구성 중 '제1부 리셋을 원하는 사람들'은 청장년층부터 노인층까지 절망을 말하는 사람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들은 왜 '다시 처음부터'를 외치고 있는가? 근대화의 과정까지 노력의 신화를 써 가던 세대들은 나라의 재건과 사회의 변혁에 자신을 희생하며 온 힘을 쏟았다. 하지만 전혀 바뀌지 않고 역행하는 현실에 대해 사람들은 심한 무기력과 분노를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제2부 리셋을 부르는 세상'은 우리 마음에 리셋을 심어놓은 사회를 조망하고 있다. 세월호 사건을 비롯한 대다수의 한국 사람이 경험하는 갑질 문화와 기득권의 부정부패, N포 세대를 만들어내는 졸업·취업·결혼 문제 등 다양한 사례를 통해 진보가 아니라 퇴보하고 있는 현실을 날카롭게 진단한다.
우울과 절망은 믿는 대로 되지 않아서 오는 것이 아니라, 믿기 때문에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변하지 않는 세상과, 철저하게 배제되고 보호받지 못하는 우리. 그래서 우리는 변혁과 재건이 아닌, 모든 것을 날려버리는 리셋을 바라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 사람들은 희망을 내려 놓지 않았다. 2016년 200만이 넘게 모인 평화적 촛불 시위는 사어로 전락해가던 혁명이 시민혁명으로, 목숨 건 투쟁이 아니라 분노의 표현이자 일상 속 축제의 모습으로 나타났음을 보여준다. '제3부 리셋을 넘어서'는 이처럼 절망과 포기가 아니라, 다시 사회 안으로 회귀할 가능성을 찾기 위한 대안들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는 리셋이 역사를 포함해 원점부터 철저하게 파괴하려 한다는 의미에서 혁명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말한다. 그런데도 사회는 우리에게 리셋만이 가능하도록 만들고, 또 리셋과 파괴의 감정만을 표출하게 만들고 있다고 말한다. 노력보다 더 노력해야 하는 '노오력'과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을 정도로 힘든 세상을 빗댄 단어가 바로 '헬조선'이다. 그러나 우리가 변화와 기대를 포기하고 리셋을 말하기 전에 먼저 묻고 풀어야 할 것들이 있다. 이 책을 통해 역행하는 사회를 함께 되돌릴 방법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창비. 1만38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