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담론]서예, 무엇이 문제이고 어디로 가야하나?

[목요담론]서예, 무엇이 문제이고 어디로 가야하나?
  • 입력 : 2017. 03.16(목) 00:00
  • 편집부기자 hl@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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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예교육은 전통적으로 전문서예가의 사사 형태로 이어오다, 대학에 서예학과가 개설되면서 역할이 분담되었다. 그러나 최근 서예교육은 소수의 개인학원과 기관이 운영하는 문화 예술강좌를 통해 이뤄지는 추세이다. 일반인을 상대로 취미와 여가활동의 기회를 주는 평생교육의 필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그러나 이런 경로를 통한 서예인구의 확산은 유명무실한 수많은 공모전의 초대작가 양산과 함께 서예의 전문성을 약화시키는 문제점을 낳고 있다.

서예를 보는 주변의 시각은 어떤가? 서예를 문패나 제사지방, 가훈쓰기, 필경 등 글쓰기 재주 정도로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서예의 오래된 역사와 숭고성에도 불구하고, 화가에게 "그림 한 점 달라" 말 못하면서 서예가에게는 "쓰다가 버리는 것 있으면 하나 달라"는 식으로 서예를 폄하하고 있는 것이다.

매너리즘에 빠진 서예가들에게도 문제가 없는 게 아니다. 아무리 글씨를 잘 쓰더라도 옛사람의 글씨를 그대로 모방한다는 것은 예술의 독창성에 위배된다는 것이 예술계의 전반적 시각이다. 지나친 임서(臨書) 맹종주의가 창신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물론 서예는 문자를 쓰는 실용예술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오늘날의 첨단문명 앞에서는 서예의 실용성도 무색하다. 결국 오늘의 서예는 예술성은 물론 실용성에서조차 빛이 바래고 있다. 그래서 '시대성 확보를 위한 서예의 현대화'가 꾸준히 담론으로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서예술의 현대화를 위해 무엇을 찾아야 할 것인가?

첫째, 전통에 천착하여 창신의 기초를 다져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서예가 놓인 문화와 환경은 과거 한자를 사용하던 전통사회와 비교할 수가 없다. 하지만 예술은 시대와 함께 성장하는 것이므로 새로운 세계와 함께 늘 열려있다. 낡은 것은 버리고 새것을 받아들여 끝없이 발전해온 서예의 역사가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둘째, 시각을 넓혀 동서의 예술심미를 융합할 수 있어야 한다. 피카소도 동양과 교류하여 서예의 용필과 동양의 정신을 배웠다고 하지 않는가. 지금은 서양의 감각적 미술도 동양의 관념중심으로 옮겨져 관심의 대상이 우주 전체와 인간정신에 미치고 있다.

셋째, 대중과 함께 호흡해야 한다.'대중이 콘텐츠(Contents)를 만든다'는 말이 있다. 창신을 위해서는 사고의 중심을 대중에 두고 미감을 갖춰야 한다. 근대 추상미술도 감상이 수월성을 찾아 급기야 대중문화의 보편성을 끌어들였다.

이러한 상황은 오늘을 사는 서예가에게 두 가지 숙제를 안겨 준다. 하나는 서예의 전통형식을 더욱 심화시켜 계승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현대예술의 시대 심미를 빌려 새롭게 보는 서예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는 마치 '보존과 개발'이라는 딜레마 속에 현대를 살며 미래를 준비하는 것과 같을 수 있다.

우리는 여전히 새로운 환경 속에 놓여진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오늘과 내일이 다를 것이다. 서로 다른 환경과 시간 속에서 잉태된 예술은 숙명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전통서예의 발전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문제는 이 시대가 요구하는 그 무엇을 찾아야 한다는 데 있다. 그것은 바로 시대가 요구하는 현대성이며 보는 서예다. 지금이야말로 미래를 믿고 준비하는 현대서예의 가능성을 우리가 열어야 할 때이다.

<양상철 융합서예술가·문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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