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시작하며]100평 들녘의 풍요

[하루를시작하며]100평 들녘의 풍요
  • 입력 : 2017. 06.14(수) 00:00
  • 강문신 hl@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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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형,

3월초부터 시작된 묘목 굴채작업은 02포크레인 2대를 풀가동하고도 몰려드는 농가들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한 때가 더러 있었습니다. 경황없던 그 와중에 소홀함인들 어찌 없었겠습니까. 모처럼 농장을 찾아주신 농가들에 미안하고 미안한 마음입니다.

연일 파김치가 되는 일상에 아내는 "제발 이제 그만 합시다."고 애원하지만, 그건 단순한 문제가 아니기에, 일단 못 들은 척하곤 합니다. 0형, 이 급변하는 세상에, 멍에 진 황소처럼 그냥 뚜벅뚜벅 그 보법 그대로만 가고 있습니다.

아침에 농장 가고 저녁에 집에 오는 단순한 생활의 연속이지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주변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모를 때가 많습니다. 꼭 봐야할 경조사를 모르는 경우도 종종 있어요. 용케도 사후엔 꼭 알게 되어, 민망하고 죄스러운 마음이 더 합니다. 0형, 농사는 정성과 집념과 체력이지요. 나름대로 운동은 열심히 하고 있지만, 워낙 계속되는 일이라, 그로기에 몰릴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예요. 그나마 큰 사고 없이 여까지 온 것을 하늘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 굴채작업이 채 끝나지 않은 4월 초순부터 접목이 시작됐습니다. 그토록 지친 몸과 맘으론 도무지 엄두가 안 나는 일이었지만, 일에는 그 시기가 있어, 강행군 할 수밖에 없었어요. 접목은, 혹 품종이 섞일까봐, 저장해둔 접수에 이상이 생겼을까봐,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합니다. 항시 기도하는 마음이지요. 그 많은 접목의 생사가 순전히 접사와 그 도우미들의 손에 달려있음을 알기에, 웬만해선 말도 크게 못 합니다. 상전 모시듯 하는 거지요. 어쨌거나 2개월여에 거친 그 접목도 무사히 다 끝났습니다. 이제사 등짐 부린 듯, 가쁜 숨을 고릅니다. 돌아보면 0형, 이 들녘의 그 경황없었던 날들이 어쩌면 꿈, 한판 굿 신명인 듯도 한 것입니다.

들녘의 시간은 빨라, 이윽고 그 많은 접목들의 고고성을 듣습니다. 노루 뿔처럼 드솟는 떡잎들의 함성을 듣는 것이니, 참으로 그 생명의 신비를 눈부시게 보는 것입니다.

0형, 당신은 늘 "작품에 목숨을 걸라" 하시지만, 이 생명들을 키우는 것도 작품입니다. 정과 혼을 다 쏟아 붙지 않으면 결코 이 많은 묘목들을 온전히 키워내지 못 합니다. 결국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이지요. 시(詩)나 묘목이나 인생이나요.

넘실대는 연초록의 그 육묘장에 들어서면, 늘 말이 없는 민낯의 여인을 보는 듯 싱그럽습니다. 그 많은 그들에 묻혀 사는 날마다가, 경이입니다.

0형, 석파시선암(石播詩禪庵) 앞의 100여 평 땅에는 귤나무외의 유실수들을 심었습니다. "미깡낭이나 싱구주 미신 시어떡헌 낭덜 아땅 싱검수광?" 말들이 많았지만, 일일이 입 아프게 대답은 안하고 그냥 심었어요. 매화 배 사과 살구 석류 무화가 복숭아 감 뽕 블루베리 등을 몇 그루씩 심어놓은 것입니다. 작년에 꽃 피고 열매 좀 달리더니 올해는 꽤 많이 달렸습니다. 특히 앵두 뽕 블루베리 봉숭아 등은 무더기로 달려 가지가 휘어질 지경입니다. 청정지역의 무농약이지요. 구석마다엔 상추 고추 오이 가지 쑥갓 미나리 세우리 취나물 방풍 삼채 제피 등이 수북하지요. 0형, 그토록 갈망하던 그 풍요가 이렇듯 작은 땅에서 오더이다. 먹는 풍요도 그렇지만, 보고 느끼는 풍요가 더 합니다. 손녀들이 와서 그 열매들을 따먹으며 환호할 땐, 금세 이 들녘이 환해지는 것입니다.

0형, 요즘 새 권력에 빌붙으려고 갖은 아양을 떨고, 게거품 물며 거짓, 변명을 둘러대는 인간들을 보노라면, 측은합니다. 우리는 이미 알지요, 비굴하고 야비한 X일수록, 더 악랄하게 군림한다는 사실을. <강문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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