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 저편에 모습을 드러내는 교회의 첨탑, 진열장에 전시된 새로나온 책, 거리의 악사, 다음 골목의 구석에 있는 나무로 만든 장난감 가게, 저쪽에 보이는 마로니에 나무 그늘이 드리운 작은 공원이 산보객을 유혹한다. 무언가 보이지 않는 매력이 영감을 주는 분위기를 만들어 피곤함도 느끼지 못하고 계속 걷지 않으면 못 배기게 만드는 그런 도시는 그 자체가 하나의 예술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도시 걷기의 인문학'이란 작은 제목이 달린 정수복의 '파리를 생각한다'를 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걷다 보면 듣고 보는 것이 많아지고 감각이 살아난다는 그다.
국내에서도 도시재생, 원도심 살리기 같은 말이 회자되면서 부러 도시를 걷는 일이 많아졌다. 대구 중구청 같은 곳은 잘 짜여진 골목 걷기 코스로 관광객 모집에 성공한 사례로 꼽힌다. 군산시는 일제강점기의 흔적 등이 남아있는 장소를 중심으로 근대 문화 역사의 거리를 조성해놓았다.
제주 역시 역사와 문화의 기억이 쌓여있다는 제주시 원도심을 걷는 게 유행처럼 이어져왔다. 도심 어느 구역을 집중적으로 걷기도 하고 주제를 정해 의미있는 장소를 답사하는 등 도시 걷기 바람이 불었다. 얼마전에는 원도심에 자리잡은 제주북초등학교의 총동문회가 개교 110주년을 맞아 제주성안 역사길 지도를 만들고 걷기 행사를 벌였다.
그동안 뜻있는 단체나 기관에서 제주시 원도심 걷기 프로그램을 펼쳐왔지만 그 길을 한번 걷고 난뒤 또 걷는 이가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다. 따거운 볕 아래, 어느 날은 달빛 아래 길라잡이를 따라 도심 곳곳으로 걸음을 옮겨놓지만 허망할 때가 있다. 유서깊은 건축물은 허물어지고 땅 아래 사라진지 오래기 때문이다. 그나마 제주시 칠성로, 중앙로 일대에 크고 작은 빗돌이 세워져있지만 그 사연을 떠올리기엔 너무 먼 시절의 이야기가 많아 감흥이 적다.
지금도 걷는 도시를 만들기 위해 제주시 원도심에는 지자체나 정부 예산이 투입되고 있다. 가깝게는 제주창조경제혁신센터가 원도심 동문시장에 비콘을 설치했다. 비콘은 스마트폰을 이용해 최고 70m정도까지 신호를 감지함으로써 관련 정보를 보다 쉽게 얻을 수 있는 근거리 위치인식 장치다.
엊그제 영국 런던에서 인기 보행 코스를 중심으로 대기오염도를 조사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자동차 통행량이 많은 큰길 대신에 뒷골목을 걸으면 대기오염물질 흡입량이 절반으로 줄어들 수 있다는 내용이다. 당연한 결과 아니냐고 반문하겠지만, 여기에서 몇 가지 '뉴스'를 읽게 된다. 대기오염이 심하다는 대도시인 런던이지만 인기있는 도보 코스가 있을 만큼 사람들이 많이 걷는다는 거였다. 또 하나는 연구팀이 대기오염도 측정 결과를 토대로 런던 시내의 '청정 대기 걷기 코스'를 찾을 수 있는 쌍방향 온라인 지도를 제작했다는 점이다. 해당 지도에 출발지와 목적지를 입력하면 목적지까지 향하는 여러 길이 제시되고 도로별 대기오염물질 수치 비교, 오염도 색깔별 표시 등이 뜬다고 한다.
오래된 제주시 원도심에 첨단의 IT기술까지 유입되고 있는 가운데 정작 그곳에 사는 이들이 어떤 길을 걷고 있는지에 대해선 무심했던 게 아닐까. '옛길'만이 아니라 제주성안으로 불렀던 원도심 사람들이 오늘날 걷고 있는 길에 주목해야 한다. 그 길에서 원도심의 빛과 그늘을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 <진선희 교육문화체육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