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시작하며]오락오득 '五落五得'

[하루를 시작하며]오락오득 '五落五得'
  • 입력 : 2017. 07.12(수) 00:00
  • 부희식 hl@ihalla.com
  • 글자크기
  • 글자크기
※'오피니언'면의 외부필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별도봉을 에둘러 가는 장수로에는 솔잎이 수북이 쌓여 있어 걷는 이들의 발길마다 부드러운 촉감을 일게하고, 바닷가 기슭을 타고 올라오는 식생은 초하의 계절을 간질인다.

침참의 과정을 거치면서 자동차를 몰다보니 30여분 만에 사려니숲길에 이른다. 사려니숲에는 벌써 많은 산행객들로 북적이고 있다. 형형색색으로 차려입은 산행객, 아름드리 삼나무를 비롯한 자연림에서 뿜어대는 피톤치드의 청정공기, 숲과 숲 사이에 조성된 붉은 화산석 송이길은 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명품 숲길이고, 에코힐링을 즐기는 모습에서 향연장을 연상케 한다. 우리가 진세(塵世)의 애환에 울고 웃으며 앞만 보고 살아가는 사이에 자연의 질서는 이렇게 풍요한 신록의 향연을 베풀고 있지 않은가.

어느새 나도 한 잎의 나무 잎새가 되어 바람곁에 흔들리고 있다. 나무 잎새에도 생명과 질서가 있고 언어의 의미도 있다. 이에 도취돼 숲속의 언저리를 기웃거리는 사이에 무언의 함성이 들린다. 이게 무정설법이 아닌가. 불현듯 나옹선사(懶翁禪師)의 시 한 수가 떠오른다.

청산(靑山)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 창공(蒼空)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 / 탐욕도 벗어 놓고 성냄도 벗어 놓고 /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짙푸른 사려니숲 속에선 숱한 사람들이 오감힐링을 즐기고 있다. 산행객들은 하나 같이 만면에 미소와 평화로움이 가득차 있고 해맑은 표정들이다. 이는 한라산의 정기와 삼림욕으로 마음의 먼지와 때를 털고 씻어냈기 때문이리라.

후미진 한켠에 앉아 온갖 상념들을 이리저리 정리하다 보니 나의 자화상이 떠오른다. 무리지어 다니던 늙은 노루 한 마리가 갈 곳을 잃고 산등성이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모습 같기도 하다.

직장생활을 하다가 때가 되면 그 집단에서 물러나는 것은 누구에게나 피할 수 없는 기정 사실이다. 그래서 '오늘은 내 날이고, 내일은 네 날이다'라고 하지 않는가. 문득, 퇴직을 하면 '오락거사(五落居士)'가 된다는 K선배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소중한 다섯 개가 떨어져 나간다는 뜻이다.

그 첫째가 한평생 종사해온 직업이 떨어져 나가고 둘째는 곁에서 도와주던 인편(人便)이 떨어져 나가고 셋째는 불규칙한 생활로 건강이 떨어져 나가고 넷째는 직장에서 느껴오던 보람이 떨어져 나가고 다섯째는 돈이 떨어져 나간다는 것이다. 한줄기 바람이 산림을 흔들고 지나간다. 부질없는 망념을 훌쩍 털어버리고 걷던 걸음을 재촉하며 걸어 가는데, 짧아진 나의 보폭을 발견하고 인생의 무상함을 느낀다. 일일삼천심(一日三阡心)이라 했듯이 이런 저런 일들을 골똘히 생각하다 보면 닫힌 마음도 열린 마음으로 수용되고 하나의 마음으로 통섭(通涉)하게 된다.

어쩌면 나는 '오득거사(五得居士)'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 첫째가 직장에서 물러났으니 큰 자유를 얻은 일이고 둘째는 그 누구의 속박도 없이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는 시간을 얻은 것이고 셋째는 책임을 벗고 긴장에서 풀려 났으니 마음의 평화를 얻은 것이고 넷째는 자연으로 돌아 왔으니 이 세상에 친구 아닌 것이 하나도 없는 셈이고 다섯째는 한평생 살아온 과오를 익혔으니 안분지족(安分知足)의 지혜를 얻고 자기다운 삶으로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리라.

석양이 질 무렵 사려니숲 속에도 산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산바람이 잎새를 흔들고 있다. 그 속에 내가 나직하게 살아 있음을 본다.

<부희식 제주교육사랑회장>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8215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