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와 함께] '꽃보다 먼저…' 이종형 시인

[저자와 함께] '꽃보다 먼저…' 이종형 시인
"시가 없었다면 험한 시간 어찌 견뎠을까"
  • 입력 : 2018. 01.04(목) 20: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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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문학의집을 지키고 있는 이종형 시인이 가족사를 넘어 제주4·3과 세월호의 비극 등을 노래한 시들로 첫 시집을 묶어냈다. 진선희기자

가족사 고백 '자화상' 등단작
4·3과 세월호, 베트남의 비극

"…그 이름들 기억해주세요"

'뜨끈한 구들장 온기 위로/ 내가 툭 떨어져 탯줄 자르기 전/ 외할아버지는 곡괭이 들고/ 어머니의 작은 방/ 그 방바닥을 다 파헤쳤다는데// 육군 대위였다는 육지것 내 아버지/ 그 씨가 미워서였다는데/ 배롱꽃처럼 고운/ 딸을 시집보내 얻은 세 칸 초가집의 평온/ 그게 부끄러워서였다는데/ 산에선 아직/ 돌아오지 못한 사내들이 많았다는데'('자화상' 중에서)

그는 마흔여덟이던 2004년에 '진술, 혹은 자화상'이란 제목을 달았던 이 작품으로 제주작가회의 '제주작가 신인상'을 수상했다. 가족사에 대한 고백이 담긴 시다. 그의 시의 출발점은 '자화상'일지 모른다. '육지것 내 아버지'에 대한 궁금증이 개인사를 넘어 해방 후 제주사회가 겪었던 수난으로 눈길을 돌리게 했기 때문이다.

얼마전 첫 시집 '꽃보다 먼저 다녀간 이름들'을 낸 이종형 시인. 8년 동안의 제주작가회의 사무국장을 거쳐 2011년부터는 제주문학의집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있는 그는 밀려드는 행정 업무를 처리하느라 한때는 시인으로서 자괴감이 들었다고 한다. 더 늦기 전에 시집을 묶어내라는 주변의 격려가 그를 일으켜세웠다.

'붉은 동백꽃만 보면 멀미하듯/ 제주 사람들에겐 4월이면 도지는 병이 있지/ 시원하게 비명 한번 지르지 못하고/ 생손 앓듯 속으로만 감추고 삭혀온 통증이 있어// 그날 이후 다시 묵직한 슬픔 하나 심장에 얹혀/ 먹는 둥 마는 둥/ 때를 놓친 한술의 밥이 자꾸 체하는 거라'('봄바다'중에서)

제주의 4월은 참으로 기구하다. 70년이 다 되어가도록 제주4·3이 드리운 그늘 아래 움츠리고 있는 이들에게 제주항에 닿으려던 세월호의 아이들이 황망히 떠나버린 소식이 들려왔다. 시인은 제주항이 내려다보이는 산지등대 오르막길에 멈춰서서 아이들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러본다.

가만히 있어도 숨이 턱턱막히는 아픔은 바다 밖에도 있었다. 제주-베트남 문화 교류에 참여했던 시인은 '가해자'가 되어버린 나라의 국민으로 그곳 사람들의 눈물과 마주한다. '당신들의 나라가 앗아간 엄마의 이름을 한 번만이라도 부르고 기억해주세요'('카이, 카이, 카이')라는 베트남 사내의 간절한 외침에서 시인은 제주의 4월과 맹골수도의 찬 바다에서 짧은 생을 마친 아이들을 떠올린다. 그들의 비극은 우리와 다르지 않았다.

시인은 이번 시집을 여는 글에서 "시를 만나지 않았다면 허기지고 외로운 시간들, 생의 변곡점을 지나는 계절들을 잘 견뎌낼 수 있었을까"라고 했다. 사진 한장 남기지 않았던 부친에 대한 원망은 4월 영령들이 아직도 못다한 말들을 시로 받아 적는 동안 차츰 잦아들었다. "태어나고 살아온 내력과도 마침내 화해"할 수 있었던 힘은 바로 시였다. 삶창. 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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