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세상] 몰락한 양반과 신흥 부자… 시대를 읽다

[책세상] 몰락한 양반과 신흥 부자… 시대를 읽다
이우성·임형택 편역 '이조한문단편집' 4권
  • 입력 : 2018. 03.16(금) 00: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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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9세기 한문소설 187편
화폐경제 등 발전하던 시기
사회 변화상 고스란히 담아

"달이 창에 비쳐 방 안이 환하다. 조씨녀가 이불을 안고 누웠다가 깜짝 놀라 일어났다. 정색을 하고 준절히 거절하는 품이 결코 허락하지 않을 것 같더니, 은근히 달래는 말을 듣고는 완연히 눈길이 부드러워지고 말소리도 낮아졌다."

제주 사람 장한철의 '표해록'을 들여다봤던 이들이라면 낯익은 문장이다. 풍랑을 만나 떠밀려갔다 살아돌아온 장한철이 일인칭으로 썼던 이 기록은 '청구야담'에 실리며 '장생이 과거를 보러 떠났다가 넓은 바다에서 표류하다(赴南省張生漂大洋)'란 제목이 달렸고 삼인청 서사가 됐다.

장한철의 수기가 '청구야담'에 묶인 건 시대적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생사의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서로 이해를 다투고 상거래를 하는 모습에서 인간의 자본주의적 성향을 읽을 수 있다. 이 시기는 신흥 부자 등이 출현하며 사회 세력 관계의 판도가 바뀌었던 때다.

18~19세기는 우리 문학사의 '소설시대'로 일컬어진다. 그 시기에 '패사소품(稗史小品)'으로 불렸던 작품을 알기 쉽게 바꾸어놓은 한문단편이 있었다. 한문단편은 주로 거리의 전기수(傳奇수)나 사랑방 이야기꾼들에 의해 전수된 서민층의 화제를 그대로 옮겼다. 그만큼 다수의 작품들이 당시의 사회와 인생에 관한 심각한 문제의 일면을 다뤘다.

이우성·임형택 편역의 '이조한문단편집'(1~4권)에는 이조 후기, 즉 18세기 이후 한문단편의 전형을 보여주는 187편이 수록됐다. 1973년 초판 발행 이후 45년만에 나온 개정판으로 현대적 문체와 장정을 입히는 등 최신 연구 성과가 더해졌다.

한문단편은 경제구조의 변화로 상업자본이 형성되고 화폐 경제가 발전하던 시기에 활발하게 생산됐다. 도시가 형성되고 농촌에서는 지주·소작 관계가 해체된다. 전통적인 양반 사대부가 몰락하는 대신 중인·서리층이 득세했고 상인, 수공업자, 농민들 중에 새로운 부자들이 생겨난다.

문학은 그같은 변화를 예민하게 담아냈다. '부부각방'엔 상업의 발전 속에 부에 대한 욕망이 극대화된 탓에 10년씩 부부 관계를 폐하고 각방을 쓰며 악착같이 재산을 모으는 인물이 등장한다. '길녀' 같은 작품은 기지를 발휘해 위기에 처한 남자를 구하고 사랑을 이루는 여성들이 주인공이다. '우마마' 등에는 중인층에게 조롱의 대상이 된 양반가의 몰락이 그려졌다. 서민들의 소소한 일상과 예인들의 삶, 다른 세상이 오고 있음을 예감하게 만드는 도적과 반란군의 이야기 등도 펼쳐진다.

시대와 걸음을 맞추고, 때로는 시대를 앞서간 이같은 한문단편엔 근대적 소설의 경지로 나아가는 현장이 있다. 창비. 각권 3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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