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미영의 제주마을탐방] (7)급변하는 아라동의 어제와 오늘

[조미영의 제주마을탐방] (7)급변하는 아라동의 어제와 오늘
남쪽 한라산·북쪽 이도2동 경계… 都·農 분위기 상존
  • 입력 : 2018. 06.19(화) 00:00
  • 이태윤 기자 lty9456@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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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 아라동 전경.

5개 법정동·12개 자연마을로 이뤄져
관음사·산천단 곰솔 등 동네 자랑거리
도시개발로 급속팽창 인구 3만명 넘어







아라리(我羅里)는 1872년 '제주삼읍전도'에 표기된 이름으로 지금의 아라1, 2동을 일컫는다. 그 외에도 과거에는 아라위, 아라우, 인다라라고도 불리었다. 본래는 북제주군 중면 지역이었으나 1914년 제주면에 편입되고, 1962년 동 개편으로 아라1, 2동과 월평동, 영평동, 오등동을 법정동으로 포함하고 있다.

5개의 법정동에는 12개의 자연마을이 있다. 아라1동에는 인다, 대원, 산천단, 구산마을이 있고 아라2동에는 금천, 월두, 간드락 마을이 있다. 월평동에는 월평마을이 오등동에는 오등동, 오등상동(고다시)마을이 포함된다. 영평동에는 영평상동, 영평하동 마을이 있다. 이들 마을 유래를 살펴보면, 우선 인다·아란 마을이 있다. 450여년 전 조선 명종 재위시 군위 오씨가 최초로 아란마을에 거주했고, 이후 인다 상동에 담양 전씨가 그리고 경주 김씨가 인다 하동에 거주하며 마을이 형성됐다. 이 곳을 통칭해 인다라(仁多羅)라고 했다.

두번째, 구산마을이다. 옛명칭은 구호름(求好凜)이다. 제주여중고 인근 지역으로 지금의 구산마을회관 남측 동산 속칭 '구름'에 처음 사람이 정착하고, 이후 나주 김씨가 '계동'에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형성됐다.

대원마을은 웃동네 '큰담밧'과 알동네 '장구왓'이 합쳐진 마을이다. 1960년 두 마을을 합병해 대원동이라 했다. 1895년 군위오씨가 아란마을에서 이주해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

산천단 마을은 1930년 경 축산업을 하기 위해 4,5세대가 이주해 오며 형성된 마을이다. 원래 이곳에는 소림사(小林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제주시 아라동 간드락마을 입구 인근에 위치한 4·3학살지

금천마을은 옛 이름이 '걸머리'이다. '탐라순력도'에는 거마로(巨馬路)로 '탐라지도'에는 걸마로촌(巨乙馬路村) 등으로 표기됐다. 이는 걸머리를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개울이 있는 마루'라는 뜻이다. 1660년 경 진주 강씨와 제주 부씨가 금산물 일대에 거주하는 것을 시작으로 마을이 이뤄졌다.

달이 뜨는 마을 간드락이 있다. 한자로 간월락(看月落), 간다락(看多落) 등으로 표기되다가 일제강점기에 간월동으로 표기됐다. 마을 동쪽 평원으로 떠오르는 만월이 아름답다해 붙여진 이름이다. 한때, 4·3의 끔직한 학살지로 스산함이 느껴지기도 했으니 이젠 그 어느 곳 보다 활기 넘치는 동네가 됐다.

월두마을은 지세가 '달머리'를 닮았다 해 월두동(月頭洞)이라고도 한다. 1660년 경 남평 문씨가 금천마을에서 이 곳으로 이주해 살며 마을이 시작됐다. 월평동의 옛이름은 '다라쿳'이다. '다라'는 높다는 뜻의 고구려어로 높은 곳에 있는 숲 혹은 덤불을 뜻한다. 1702년 탐라순력도에는 별라화(別羅花)라고 표기됐는데 이는 다라쿳의 한자식 표현이다.

오등동 마을은 '오드싱'과 '다시'마을이 합쳐진 것이다. 1702년 탐라순력도에는 오등생리(吾登生里)와 간다시가 동시에 명시돼 있다가 1783년 '제주읍지'에는 오등생리(吾登生里)로 1904년 '삼군호구가간총책'에 오등(梧登)이라 기록됐다. 오등상동마을을 '고다시'라고 한다. 탐라순력도에는 간다시(艮多時)라고 표기됐는데 이는 한자식 표현이다.

영평상동의 옛 지명은 '가시나물'이다. 이곳의 설촌유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나주 김씨 종가 울타리에 있는 영평 조록나무와 진주 강씨 묘소의 금석문의 기록을 기준으로 할 때 약 1500년 초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영평하동은 약 500여년 전 전지(前池) 즉, 앞못을 중심으로 촌락이 형성됐다고 해 '알무드내'라고 불리던 곳이다. 이후 좀 더 평평한 농지를 찾아 이주해 '삼군호구가간총책'에는 영평(寧枰)이라 기록돼 있다.

이 외에도 아라동 웃인다마을과 오등동 죽성마을 등이 있었으나 4·3당시 중산간 지역에 대한 초토화 작전으로 소개된 채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최근에는 도로가 뚫리고 개발규제가 풀리며 다시 마을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아라동은 남쪽으로 한라산과 인접하고 북쪽으로는 이도2동과 경계를 이룬다. 덕분에 도시와 농촌의 느낌을 골고루 갖추고 있다. 주민자치위원회에서 개발한 아라올레길은 이런 특성이 잘 담겨진 산책로이다. 제주 불교의 중심인 관음사도 아라동에 속한다. 천연기념물 160호인 산천단의 곰솔도 동네의 자랑거리다.

이전에는 제주시와 서귀포시를 연결하는 주요관문으로의 역할이 컸다. 하지만 최근엔 지속적인 도시개발의 영향으로 급속히 인구가 증가하며 1만3000세대에 3만2881명(2018년 4월 통계)이 거주한다. 면적도 70.48㎢로 동 단위로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

대학병원과 주요 기관들이 속속 아라동으로 편입돼 오고 있다. 관내에 학교가 12개이다. 급작스런 변화는 때론 기회가 될 수도 있지만 위기가 될 수도 있다. 마을의 정체성과 방향을 제대로 세워 지역민이 살기 좋은 마을로 거듭날 수 있길 바란다.

[인터뷰] 강순명 아라동주민자치위원장 "마을상생위해 징검다리 역할"

아라동은 약 500~300년의 역사를 가진 마을들로 구성됐다. 중산간이라는 이유로 4·3 당시 피해를 입고 다시 재건해 오늘에 이른다. 최근 10년 커다란 변화로 조금 당혹스럽지만 여러 좋은 점도 많다. 이를 기회로 살려 잘 이끌어보고자 한다.

마을 자치위원이 31명이다. 마을 토박이와 최근 아파트로 이주한 이들이 골고루 참여하고 있다. 마을의 상생을 위해 자치위원들이 징검다리 역할을 해 줄 것이라 보고 있다.

마을의 상생을 위해 자치위원들이 징검다리 역할을 해 줄 것이라 보고 있다. 각종 취미 프로그램은 물론 아라올레길 개발 등 마을의 주요사업들을 해왔다. 앞으로도 좋은 구상으로 마을 발전에 이바지 할 것이다.

아쉬운 점은 농사를 짓던 땅에 주택단지가 들어서며 농토가 사라지고 있다. 원주민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했었는데 부모세대가 지나고 나면 농사를 지을 사람들이 없다. 아라동은 딸기농사로 유명했는데 도시개발로 지가가 상승하며 딸기 농가가 많이 줄었다. 지금은 약 80농가에 그친다. 영농법인으로 등록된 '아라주는 딸기'가 꽤 성공적으로 인지되고 있지만 앞으로 어떻게 명맥을 유지할 지가 고민이다. 모두가 지혜를 모아야 한다.

[인터뷰] 김덕홍 아라동장 "주민들 커뮤니티 공간 조성 노력"

인구가 지속적으로 증가해 최근 5년 사이 급속도로 팽창하고 있다. 아라초등학교가 포화상태다. 이에 따른 주변 인프라 확충이 시급하다. 공유지를 확보해 주차장을 확충하고 주변 편의시설을 늘려야 한다. 아쉽게도 관내에 도서관이 없다. 거점지역마다 조그마한 문화 공간과 도서관, 체육공원 등이 마련돼 주민들의 커뮤니티 공간으로 활용됐으면 한다.

또한 6개의 중심 하천을 가꿔 생태공원으로 조성할 것이다. 그 외에도 과거의 아라동을 기억할 수 있는 마을박물관을 마련해 볼 생각이다. 우선 주민자치센터 내에 조그마한 공간을 활용해서 마을의 기록들을 정리해 놓는다면 과거와 현재의 아라동을 이어가는 가교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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