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규호의 구라오(古老)한 대국] (3)모덩의 시대

[심규호의 구라오(古老)한 대국] (3)모덩의 시대
아편전쟁 패배는 구라오한 중화문화 재편 신호탄
  • 입력 : 2019. 04.03(수) 20: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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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시 역사발전진열관에 전시된 상하이 아편굴 모형.

아편전쟁 후 남경조약 체결
작은 포구 불과하던 상하이
양인 거주지서 국제도시로
중국을 개 취급하던 모던기
매판자본은 그들만의 모던
이식되고 강요된 근대 폐해

모덩(modern의 음역)은 근대와 현대를 모두 포함하는 단어이다. 때로 헷갈린다.

헷갈리는 것도 당연하다. 모던(modern)의 의역인 근대나 현대가 본래 우리와 상관없는 박래품舶來品, 즉 멀리서 배를 타고 온 이방의 것들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서구의 근대는 16세기 초엽 르네상스와 대항해시대에서 시작하는 초기 근대와 1789년 프랑스 혁명과 산업혁명에서 시작하여 제1차 세계대전으로 끝나는 후기 근대로 나눈다. 근대의 표징은 자본주의와 공업혁명, 왕정의 몰락과 시민사회의 대두, 기계와 발명, 이성과 진보에 대한 믿음과 계몽주의 등이다. 하지만 서구 열강의 침략으로 식민지화되거나 강제로 근대로 편입하게 된 인도와 중국, 한국, 일본 등은 사정이 다르다.

상하이 모던 포스터.

중국의 근현대사는 몇 가지 정치적 사건에 의해 구분된다. 일반적으로 1840년 아편전쟁부터 1919년 5·4운동까지는 반식민半植民 반봉건 사회로 근대라고 칭하며, 이후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까지는 구민주주의舊民主主義 혁명시기로 현대라고 한다. 그리고 이후부터 지금까지를 당대當代라고 부른다. 때로 1978년 제11기 삼중전회부터 개혁개방과 사회주의 현대화건설 시작하면서 신시기新時期라고 부르기도 한다.

중국의 근대는 아편으로 인한 기이한 전쟁의 패배에서 시작한다. 1684년 청조는 명조의 해금령을 해제하고 광저우廣州를 교역항으로 개방하면서 공행公行을 통한 대외무역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상당히 짭짤했다. 포르투갈,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스페인 등 유럽 열강의 상인들이 몰려들었고, 그 중에서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하여 향료무역을 독점하기 시작한 영국은 보다 적극적이었다. 17세기에 들어와 영국인들은 아라비아커피와 중국차에 맛 들여 매 가정마다 수입의 10분의 1을 차 구매에 사용할 정도였다.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청조에서 수입하는 물량의 92%가 찻잎이었다. 대신 영국산 모직물을 팔고 싶었으나 모직은 중국인들에게 오랑캐나 입는 옷이었다. 영국은 당시 국제무역을 통해 벌어들인 응양鷹洋(멕시코 은화, 묵은墨銀)을 찻잎 구매에 사용했다. 중국에서 유통되던 백은白銀의 60~70%는 해외무역에서 얻은 것이었다. 무역역조에 시달리던 영국은 인도에서 양귀비가 지천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쾌재를 불렀다. 향료와 후추, 찻잎에 이어 아편이 무역상품이 되어 중국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영국은 적자를 만회하고, 중국은 은본위 화폐제도 하에서 막대한 은의 해외유출로 경제적 혼란이 심화되면서, "3000년 이래로 아편의 해독만큼 큰 재앙이 없었다"고 할 정도로 심각한 사회문제가 불거졌다. 이후 임칙서林則徐가 광동성 호문虎門에서 영국 상인에게 빼앗은 아편 2만여 상자를 불태우고, 이에 반발하여 1840년 영국의 자유당 내각이 청국 원정을 의결했다. 그 해 4월 국회 상·하의원은 빅토리아 여왕의 영향 하에 271대 262로 군사비 지출을 승인했다. 신사의 나라라고 칭해지던 영국의 민낯을 보여주는 날이었다.

아편전쟁 결과 1942년 최초의 불평등조약인 남경조약이 체결된다. 홍콩은 영국에 할양되고, 상하이는 광저우, 샤먼(廈門), 푸저우(福州)와 닝보(寧波) 등과 함께 개방되었다. 상하이의 조계지는 이렇게 생겨났다. 작은 포구에 불과한 상하이는 19세기 중엽(도광 23년, 1845년) 양인洋人들의 거주지가 되더니 19세기 말 이미 세계의 문물이 자유롭게 들고나는 국제도시로 탈바꿈했다. 1865년 베이징을 시작으로 1875년 상하이에서 영국 자본에 의해 철로가 만들어졌다. 처음 본 기관차로 인해 조야가 시끄러운데 누구는 중국 전통의 풍수지리에 맞지 않음을 한탄했고, 또 누구는 시커먼 연기를 보며 탄전炭田의 고갈을 염려했다. 그리고 도부挑夫(짐꾼)가 사라져 유민이 되면 나라가 시끄러울 것이라고 걱정한 이들도 있었다. 얼마 후 가난한 노동자들은 쿠리苦力(외국인이 중국노동자를 부르는 명칭, Coolie)가 되어 금이 넘쳐난다는 구금산舊金山(샌프란시스코)을 비롯한 미국 각지로 팔려나가 철도를 깔았다.

민국시기 상하이 와이탄.

황포강黃浦江을 사이에 두고 서쪽에 위치한 와이탄에 고딕, 바로크, 르네상스 등 온갖 형식의 건축물이 즐비하게 늘어섰다. 주로 외국계 은행과 총회總會(클럽), 기업, 신문사 등이 자리한 그곳은 모던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십리양장十里洋場이었다. 모던한 대도시에 양장洋裝을 입고 단발을 한 모던 보이와 모던 걸이 활보하고, 30년대 후반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Modern Times)'가 상영되면서 '모덩'이라는 말이 크게 유행했다. 마오둔茅盾은 초기 산문 '건강미(健美)'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십리양장은 사실 기형적인 식민화된 자본주의 사회에 불과하다."

낙타는 1920년대 베이징의 중요 운송수단이었다.

실제로 상하이나 톈진天津, 한커우漢口 등 중요 개항지나 조계지에는 여전히 전족纏足으로 뒤뚱뒤뚱 걷는 여인과 변발에 장포長袍나 마괘를 입은 남자들이 절대 다수였으며, 당시 수도 베이징에는 여전히 수레와 인력거, 낙타가 중요 운송 수단이었다. 가장 신난 이들은 제국주의 열강의 진출에 따라 양행洋行과 자국시장을 중개하는 매판買辦들이었다. 일개 거간꾼이나 종업원에 불과했던 그들은 근본적으로 열강의 자본에 기생하여 폭리를 취하고, 관료나 자본가들과 결탁한 모리배에 불과했다. 여전히 봉건주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상태에서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에 속수무책인 중국에서 매판과 기형적인 관료자본주의가 깊이 뿌리 내리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1925년 12월 '중국사회 각 계급 분석'에서 이렇게 말했다. "제국주의와 결탁한 일체의 군벌, 관료, 매판계급, 대지주계급 및 그들에 예속된 일부 반동 지식계는 우리들의 적이다."

1903년 9월 11일 저우줘런(周作人, 문학가, 루쉰魯迅의 동생)은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오전에 차를 타고 고창묘高昌廟에 갔다가 펑세천封燮臣을 만나 함께 십육포十六浦로 갔다. 도중에 공원을 지나게 되었는데 상당히 넓고 짙푸른 잔디가 눈에 가득 들어왔다. 공원 안에서 거닐고 있는 백인들은 너나할 것 없이 만족스러운 표정인데 유독 중국인만은 들어갈 수 없었다. 출입구에 걸려 있는 팻말에 '개와 화인은 들어올 수 없다(犬與華人不准入)'는 일곱 글자가 적혀 있었다. 우리 중국인을 개와 같이 취급하다니 슬프구나! 공원 주변 철책을 에워싸고 구경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으나 불평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어찌 냉혈冷血이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루쉰 박물관 소재 영인본)

중국인을 개 취급하던 모던 시대에 일부 매판자본과 부패한 관료, 건달 그리고 모던 보이와 걸들은 그들만의 모던을 즐기고 있었다. 모던이 자발적이거나 의도한 것이 아니라 이식되고 강요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아편전쟁은 전쟁에서 패배한 것만이 아니라 전반적인 중화질서의 해체를 의미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구라오한 중화문화를 재편하라는 신호탄이었다는 뜻이다. 진정한 모던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한다.

<심규호·제주국제대학교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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