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가지 방위에 공간 개념
금목수화토 오행으로 연결
삼강오상과 오장 등의 탄생
어두운 밤하늘 방향 알려준
북극성은 천왕대제 사는 곳
성인남면·북면에 담긴 위정
지금으로부터 2300여년 전 초나라 사람 굴원屈原(대략 기원전 340-278년)은 '하늘에 묻는다(天問)'에서 이렇게 읊었다.
"아득한 옛날의 시작은 누가 전해주었는가? 위아래가 아직 형성되지도 않았는데 천지는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어둠과 밝음이 혼탁하고 불명한데 누가 근원을 궁구할 수 있는가? 모호한 혼돈일 뿐인데 어찌 확실히 인식할 수 있는가? 낮은 밝고 밤은 어두운데 어찌하여 그러한가? 음양과 하늘이 결합하여 만물이 나왔다고 하는데 무엇이 근본이고 무엇이 변화인가?"
이러한 질문이 어찌 그만의 것이었겠는가? 태고이래로 끊임없이 뜨고 지며, 차고 이지러지는 해와 달을 보면서, 봄이 어느새 후딱 지나고 뜨거운 여름이, 다시 소슬바람 부는 가을을 지나 엄동설한이, 그리고 다시 봄이 찾아오는 사계절의 순환을 피부로 느끼면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저절로 그러한 것(自然之物)의 연유를 묻고 탐구하려는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동서남북, 중앙에 대한 인식도 이러한 의문과 나름의 깨우침에 대한 결과물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방위가 명확하게 인지된 것은 아니었다.
기원전 초나라 사람 굴원의 '천문(天問)' 그림
동東은 동쪽이 아니라 양쪽을 묶은 자루를 뜻하며 전대나 자루의 뜻인 탁을 지칭한다. 수렵을 했던 옛 사람들은 동이 트면 잠자리에서 일어나 자루를 들고 수렵에 나섰다. 그런 까닭에 자루를 나타내는 동이 해가 뜨는 동쪽의 뜻으로 가차假借되었다. 동한東漢 사람 허신許愼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자전인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동은 해가 나무 사이, 고는 해가 나무 위에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해석하면 동서東西를 중국어로 물건으로 풀이하는 까닭을 알 수 없다. 그는 갑골문의 존재를 몰랐다. 은나라 멸망 후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난 갑골문이 1899년에야 비로소 재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구주 산천 실증총도
서西는 도기로 만든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리는 모습을 본뜬 글자이다. 서산에 해가 기울면 밖에 나갔던 이들이 돌아오고 물을 길어 밥을 짓기 시작한다. 여기에서 서쪽을 뜻하는 글자로 가차되었다. 일설에는 새가 둥지에 있는 모습을 본뜬 것이라고 한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면 새들이 보금자리로 돌아오니 여기서 서쪽의 뜻을 빌렸다는 말이다.
남南은 독특한 글자이다. 금속으로 만든 타악기의 형상을 본뜬 것인데, 장강 일대 남방에 사는 민족의 고유악기였다. 남방 사람을 지칭하는 뜻으로 가차된 것도 자연스럽다.
북北은 일반적으로 배背, 즉 두 사람이 서로 등을 대고 있는 모습으로 풀이한다. 서로 싸우다 등을 보인다는 것은 도망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北에는 도망치다, 패배敗北의 뜻이 있다. 하지만 왜 북쪽을 나타내느냐고 하면 딱히 할 말이 없다. 오히려 사람과 그림자를 합쳐놓은 글자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해가 떠 있는 남쪽을 바라보면 뒤에 있는 그림자는 북쪽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중中은 갑골문이나 금문金文(종이나 세발솥에 주조되어 있는 문자라고 하여 종정문鐘鼎文이라고 부른다) 모두 깃발이 흔들리는 모양을 나타낸다. 일설에 따르면, 해를 관측하는 막대기(표表)나 화살 가운데를 형상한 글자이다.
이렇듯 동서남북과 중앙, 다섯 가지 방위(五方)는 처음에는 방위와 관련이 없이 사용되었다가 점차 공간을 구분하는 개념으로 변화했다. 사람의 인지가 점차 발전하면서 가져온 결과이다.
사방과 중앙에 대한 인식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동쪽은 해가 떠오르는 곳이니 온난하고 유화하며, 남쪽은 해가 내리쬐는 곳이니 뜨겁고 건조하다. 서쪽은 해가 지는 곳이니 황무하고 소슬하며, 북쪽은 한랭한 곳으로 빙설에 뒤덮여 춥고 어둡다. 이에 반해 중앙은 사방의 이점을 모두 받아들여 비옥한 자양분에 만물이 풍성한 곳이다. 그렇다면 동방은 목木, 남방은 화火, 서방은 금金, 북방은 수水, 그리고 중앙은 토土라고 하면 어떨까? 금목수화토, 즉 오행五行의 시작이다. 언제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세상만물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라는 질문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동일하다. 예컨대 아리스토텔레스는 물질의 기본요소를 물, 불, 흙, 공기, 엠페도클레스는 만물의 근원은 바람, 불, 물, 흙이라고 여겼다. 중국인이 금목수화토, 다섯 가지를 만물의 근원으로 생각한 것과 유사하다. 다른 점은 이것이 오행으로 발전하면서 단순히 환원주의적 관점에서 물질의 구성요소나 질료로만 생각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행은 행함이니 공능이나 효능을 말한다. 수는 단순히 물이 아니고, 금은 단순히 쇠나 황금이 아니라는 뜻이다.
오행 상극(相克) 이미지
음양과 오행을 학문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이는 전국 시대 제나라 직하稷下에서 활동한 학자 추연鄒衍이다. 그는 음양과 오행이론을 결합시켜 음양오행사상을 확립했는데, 특히 오덕종시설五德終始說을 제출하여 왕조의 흥폐가 오행의 운행원리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 지금 생각하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처럼 들릴지라도 당시에는 나름 인기가 있었다. 그에 따르면, 하夏는 목덕木德, 은은 금덕, 주는 화덕인데, 진秦이 바로 수덕이니 다음 승자는 바로 진나라인 셈이다. 이른바 관념에 불과한 오행상극五行相克에 따른 결과이나 사실 놀랍고 대단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추연의 음양오행설을 유가에 접목시킨 이가 바로 한나라 대유大儒 동중서董仲舒이다. 그는 무제의 책문策問(천자가 정치에 관한 계책을 물어 답을 쓰도록 함)에 응하여 이른바 천인삼책天人三策을 건의하여 채택되었다. 그는 천재지변의 원리에 의해 음양이 서로 바뀌며 운행하는 이치를 추론하여 그것이 정치와 어떤 연관이 있는가를 밝히는 한편, 백가 사상을 배척하고 유가만을 독존케 함으로써 통치와 기강이 하나가 되고 법도가 명확해지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른바 독존유술獨尊儒術의 시작이자 길상재이설吉祥災異說과 천인감응설의 시작이다.
이러한 일련의 학문연구와 관념의 변화에 따라 단순히 방위를 나타내던 오방五方이 점차 인문학적 사유로 확대되면서 중국문화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끼쳤다. 우선 오행에 따라 사람이 반드시 지켜야할 삼강오상三綱五常이 만들어지고, 사람 몸은 오장五臟으로 규격화되었으며, 심지어 사계절은 사람의 사지四肢와 부합하는 것이 되었다. 하늘에는 오성五星이 있고, 땅에는 오방이 있으며, 산에는 오악, 임금은 오제五帝, 어디 그뿐인가? 오미五味, 오색五色, 오음五音, 오관五官 등등 참으로 다섯이 많다.
지구의 축선을 일러 자오선子午線이라고 하며, 동서를 잇는 선은 묘유선卯酉線이라고 한다. 자오선은 자전축으로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기준선이 된다. 자오선이 하늘로 뻗어나가 만나는 별이 바로 북극성이다. 사람들은 어두운 밤하늘에서 북극성을 보고 방향을 알았다. 절대로 변화하지 않는 북극성(사실은 지구의 세차운동으로 미묘한 차이가 생긴다)은 하늘의 중심인 자미원紫微垣을 통치하는 천황대제天皇大帝가 사는 곳이다. 천인감응이니 땅의 임금 역시 북쪽에서 거할 수밖에 없다. 공자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덕으로 정치를 하는 것은 북진北辰(북극성)이 제자리에 있으면 뭇 별들이 그 주위를 도는 것과 같다(爲政以德, 譬如北辰, 居其所, 而衆星共之)."('위정爲政') 이른바 성인남면聖人南面, 즉 성인, 임금은 북쪽을 등지고 남쪽을 바라본다는 뜻이다. 반대로 북면北面은 남의 신하가 된다는 뜻이다. 베이징 자금성의 정문이 바로 오문午門이다.
<심규호·제주국제대학교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