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규호의 구라오(古老)한 대국] (12)문화와 컬처

[심규호의 구라오(古老)한 대국] (12)문화와 컬처
인간이 두팔 벌리고 선 文… 바꾸거나 생성하는 化
  • 입력 : 2019. 06.13(목) 00: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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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의미를 생각하게 만드는 여러 이미지들.

서구 문화 개념 인간 역량의 총체
중국은 '인문'과 '화성천하' 의미
'인문으로 교화한다'를 줄여 문화
한어 '문화정도'는 학력의 정도
서양의 컬처 대입하면 맞지 않아
문명-야만 잣대는 공유지점 있어


지금 우리에게 '문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거의 우문에 가깝다. 문화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이 영위하는 삶의 여러 형태와 그 결과물을 모두 포함할 정도로 방대하기 때문이 아니다. 인간이 이루어놓은 모든 것을 일러 통틀어 문화라고 지칭할 수 있다면 사실 문화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오히려 거의 모든 것을 문화로 연계시키려는 무지 또는 무시 때문이다. 전통, 상업, 방송, 고전, 게임, 음식, 남녀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문화이고, 심지어 문명이란 말 자체도 어느새 문화로 간판을 갈아달고 있는 요즘, 문화는 그야말로 무소불위無所不爲이자 무소부재無所不在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를 최상위 개념으로 올려놓는데 인색하다. 오히려 문화는 종속개념으로 등장할 때가 더 많다. 물론 안다. 지금과 같은 사회에서 어찌 명실이 상부하기를 바랄 것인가?

서구의 문화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으로 대별되는 종교적 토대를 가지고 있다. 양자의 신은 각기 다르지만 중세기를 거치면서 교묘한 어울림을 통해 서구 문화의 바탕이 되었다. 예컨대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최고의 신학자이자 철학자로 1323년 성인으로 추증된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체계는 그리스에서 아라비아를 거쳐 새롭게 유럽으로 유입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참조계로 삼고 있다. 각설하고, 양자 공히 신과 인간이 각기 다른 세계를 가지고 있다. 신은 신 또는 신들의 세계를 지니고 있으며, 인간은 신이 허락한 세상에서 자신들의 삶을 영위할 권리와 의무를 지닌다. 그것은 자연을 개척하여 문명을 건설할 권리이자 의무이다. 라틴어 쿨투라(cultura)에 어원을 둔 말인 컬처(culture, 문화)가 경작, 가공, 재배, 교양敎養, 예절 등의 함의를 지닌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다시 말해 넓은 의미에서 서구의 문화 개념은 인간이 인간의 세상에서 인간의 역량으로 만들어낸 총체라는 뜻이다.

문화의 의미를 생각하게 만드는 여러 이미지들.

이에 반해 중국의 문화文化 개념은 크게 다르다. 우선 文이란 글자는 사람이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는 모습을 본떴는데, 갑골문에 보면 가운데 마치 뭔가를 그려 넣은 형태이다. 혹자는 이를 일종의 문신文身으로 보고 있다. 문을 문紋, 즉 문양과 무늬의 뜻으로 사용하고 있으니 일리가 있다. 예를 들어 "물상物象이 서로 얽혀 있으니 이를 일러 문이라고 한다(物相雜,故曰文)."('역·계사하系辭下') "문은 교차하는 필획으로 문양이 갈마드는 것과 같다(文,錯畵也,象交文)."('설문해자') 분명 문양이나 무늬의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무늬는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해와 달, 별이 빚어내는 하늘의 무늬, 천문天文이 있고, 땅에는 산과 내, 구릉과 늪지가 연출하는 땅의 무늬, 지문地文이 있다. 사람은 하늘과 땅의 중간에 존재하는 만물의 영장으로 삼재三才에 속하니 당연히 사람의 무늬인 인문人文이 있다.

그렇다면 인문이란 무엇인가? 오랜 옛날부터 천문을 관찰한 이들은 하늘의 무늬(해와 달, 별)가 규칙적이고 조화롭게 운행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인문 역시 이를 따라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천도가 자연의 규율에 따른다면 인륜은 사회 규율에 따르는 것이 당연하다는 뜻이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 예를 들어 군신, 부자, 부부, 형제, 친구 등의 관계가 그러한데, 이를 조화롭게 만드는 것이 바로 예의와 덕행德行이다. 천문이 밤과 낮, 구름과 비를 연출한다면 인문 역시 시서詩書와 예악으로 무늬를 만든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문물전적文物典籍, 예악제도, 덕행수양 등이 인문의 주종이 된다. 이러한 인문을 보다 구체적이고 명쾌하게 말한 이는 공자이다. '논어·선진'에 보면 공자가 자신의 제자들 가운데 뛰어난 이들을 네 부류로 분류하는 대목이 나온다. "덕행, 언어, 정사政事, 문학" 이 네 가지가 바로 사람이 배워야할 인문의 중요 과목이다.

사진 왼쪽은 갑골문에 나타난 문(文). 사진 오른쪽은 천지인 삼재. 사람은 하늘과 땅의 중간에 존재하는 만물의 영장으로 삼재에 속하니 사람의 무늬인 인문이 있다고 했다.

문화의 '화化'는 바꾸거나 생성 또는 조화의 뜻이다. "수컷과 암컷이 교미하니 만물이 생겨난다."('역·계사하')에 나오는 化가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문과 화가 만나게 된 것일까? '역·분괘賁卦'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천문을 관찰하여 때의 변화를 살피고, 인문을 관찰하여 천하를 개선시킨다(觀乎天文, 以察時變. 觀乎人文, 以化成天下)." 공영달孔潁達은 '주역정의周易正義'에서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았다. "인문을 관찰하면 천하를 개선시킬 수 있다는 것은 성인이 인문, 즉 시서예악을 관찰하였으니 이러한 가르침을 본받아 천하를 개선시켜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제왕의 시호諡號 가운데 '문文'이 "경위천지(經緯天地)", 즉 천하를 잘 다스린 제왕에게 붙여진 것도 바로 이런 뜻으로 말미암는다. 모든 것을 고적古籍 창고에서 꺼내어 참조하길 좋아하는 중국학자들은 '인문'과 '화성천하'가 바로 "인문으로 교화한다(以文敎化)"는 뜻이며, 이를 줄인 말이 바로 '문화'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문화라는 말이 옛 전적에 없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서한 사람 유향劉向은 "무릇 무력을 일으키면 복종하지 않고 문화를 고치지 않으면 연후에 토벌한다(凡武之興, 爲不服也, 文化不改, 然後加誅)."고 화이사상(華夷思想)이 날 것으로 표출되는 살벌한 발언을 한 적이 있다. 그렇다고 '이문교화'가 곧 문화라는 개념이라는 뜻은 아니다. 단지 축약일 따름이다. 생각건대 고대 중국의 문화 개념은 곧 인문을 뜻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인문이야말로 하늘과 땅의 무늬에 비견되는 사람이 무늬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금의 인문학(humanities)에 포함되는 학문이나 수양, 배양, 교양의 함의를 지니고 있을 뿐 컬처처럼 경작의 뜻이 없다. 또한 문명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도 아니다.('문화'라는 개념을 정의한 타일러(E.B. Tylor)는 문화와 문명을 동일시했다) 따라서 서구의 컬처와 딱 맞아떨어지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맞다.

모난 술잔. 논어에는 "모난 술잔인 고가 모나지 않는다면 그게 고냐"는 말이 있다.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에 가장 혼란을 겪은 것이 언어, 특히 개념의 교환이다. 19세기에 들어와 약삭빠른 일본학자들 덕분에 많은 서양언어가 한자로 번역되었는데, 그 사이에 컬처가 문화로 바뀌었다. 일본인이 만든 번역어 가운데 가장 형편없는 단어인 경제經濟와 더불어 문화 또한 심각한 후유증을 남길 수밖에 없었으나, 어느 시절이라고 "고고가 고고냐"고 외칠 수 있었겠는가?

이렇듯 서양의 컬처와 중국의 문화(인문)는 다른 개념이다. 한어에 '문화정도文化程度'라는 말이 있다. 문화수준과 달리 주로 학력의 정도를 뜻한다. 다시 말해 인문학의 수준이 어느 정도냐는 뜻과 상응한다. 이런 전통에 서양의 컬처를 대입하면 삐거덕거리는 것이 당연하다. 다만 서구의 문화(문명)나 중국의 인문이 서로 공유하는 부분이 있다. 전자는 문명과 야만이라는 잣대로 인류를 구분하여 자신들의 침략을 미화했고, 후자는 인문의 화하華夏와 야만의 이적夷狄을 구분하여 토벌을 불사했다는 점이다. 예나 지금이나 문화는 권력이자 패권이다.

사족蛇足 한 마디. 중국식으로 하자면 문화정도가 높은 사람일수록 문화인이자 교양인이다. 그런데 요즘 문화인이나 교양인이라 자처하는 이들을 보면, 문화정도가 높다는 것은 알겠는데 과연 그들이 진짜 문화인, 교양인지는 자꾸만 의심이 간다.

<심규호·제주국제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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