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규호의 구라오(古老)한 대국] (14)아속공상(雅俗共賞)

[심규호의 구라오(古老)한 대국] (14)아속공상(雅俗共賞)
속문화·아문화 수용과 견제 활발해야 전체 문화도 발전
  • 입력 : 2019. 06.27(목) 00: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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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문화인 금(琴)·기(棋)·서(書)·화(畵)

봉건시대 계층별 노는 것 달라
안사의 난 이후 사회계급 변화
아속 전도 고상·비속 구분 안돼
서로 영향 받으며 뒤섞인 아속
되레 토속적인 것이 주류인 듯
아속공상 진정한 함의는 유보적


아속공상은 아인이나 속인이 함께 즐긴다는 뜻이다. 요즘 너나할 것 없이 영화를 즐기고 프로야구나 축구에 온 국민이 들썩거리며, 연예 프로그램에 매료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하지만 중국 봉건시대에는 계층마다 감상하고 즐길 수 있는 것이 달랐다. 계층이 다르니 노는 것도 달랐다는 뜻이다.

중국 봉건전제 시대는 철저한 계급사회이자 계층사회였다. 군주와 백성, 문벌세족과 평민, 유식자와 무식자, 지주와 소작농(고농雇農 포함) 등으로 구분되었고 군신, 남녀, 적서嫡庶, 직급은 물론이고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직업, 경사京師와 군현의 지역에 따라 차별 대우를 받아야만 했다. 이는 근현대까지 이어졌다.

춘절 때 묘회에서 추는 용춤

마오쩌둥은 '중국사회의 각 계급 분석'이란 글에서 "누가 우리의 적이고 누가 우리의 벗인가? 이것이 혁명의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라고 운을 뗀 후 경제적 측면에서 자산계급(지주와 매판계급, 중산, 소자산 계급 포함)과 무산계급(소무산계급, 무산계급 포함)으로 대별한 바 있다. 물론 이는 지주계급과 매판계급을 적으로 지목하여 혁명의 주체를 찾고자 함이지만 여전히 계급사회에 살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아문화의 주체를 자임한 사인士人(또는 사대부)은 철저하게 계급에 복무하는 나름의 문화를 창출했다. 그들은 유가 경전과 교육, 예법을 기반으로 한 도덕규범과 격식, 시문詩文과 서화 등을 통해 중국문화의 우아한 품격을 창출했다. 그것은 어떻게 하면 인간의 본성에 자리하고 있는 선한 마음(맹자의 사단四端)을 계발하여 선양할 것인가라는 점과 자연스러운 정감의 발현을 어떻게 하면 올바른 길로 유도할 것인가라는 점에 치중되었다. 그런 까닭에 아문화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예법을 통한 교육과 절제였다. 자율보다는 타율에 의지했다는 뜻이다. 순자가 정감에 쉽게 동요되는 인간의 본질을 간파하여 교육과 예법을 통한 인위적인 통제와 절제를 중시하여 자신의 저작 '순자'에서 '권학勸學'을 첫머리에 둔 것은 이 때문이다.

황토고원의 동굴집

하지만 아문화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별개의 것이 아니라 민속에 기반을 둔 것이다. 예법은 민간의 관습에 기반을 두었으며, 교육 역시 그 시작은 학교가 아니라 가정이었다. 아문화의 중요 성분인 문학에서 시문은 아문학, 소설과 희곡은 속문학으로 간주되었다. 문학을 아속으로 구분하기 시작한 것은 근대의 일이지만, 시부詩賦나 산문을 문학의 정종正宗으로 여기고 소설이나 희곡 등을 잡기 정도로 여긴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시문이 정종인 까닭은 그것이 고대 경전이자 유자의 필독서이기 때문이니, 그런 까닭에 과거科擧의 필수과목이 되었다. 그러나 유가의 경전으로 시가의 총집이자 전범이라고 할 수 있는 '시경'의 풍아송 가운데 '풍'은 사실 주나라 15개 제후국의 민요 160편을 모은 것이다. 그 중에는 예로부터 음탕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하여 공자조차 싫어했다는 정풍(鄭風), 즉 정나라 민요도 있고, 지배자를 칭송하는 송頌과 정반대로 관리나 통치자를 조롱, 비판하는 내용도 들어가 있다. 송대 유행했던 사詞는 민간의 노래에서 비롯된 시가이다. 원래 음악이 살아 있었는데 문인들이 본격적으로 창작하면서 음악은 사라지고 가사만 남았다. 송대의 문학은 시가 아닌 사가 으뜸이라고 할 정도로 사가 크게 발전했다. 말인 즉 '아'속에 이미 '속'이 들어가 있다는 뜻이다. 또한 소설小說은 패관稗官(항간巷間에 떠도는 풍설과 소문을 모아 기록하던 관리)이 정치에 도움을 주기 위해 수집하던 이야기에서 시작되었다. 그래서 비록 말석을 차지하기는 했으되 반고班固의 '한서·예문지藝文志'에 제자諸子 항목에 '소설가'라는 명패를 달게 되었다. 조선시대 정조正祖가 사람의 마음을 해친다고 하여 패관소설을 짓지 못하게 했고, 반고 역시 "천박하고 황당한 이야기"라는 주注를 달기는 했으나 위진남북조 시대 지괴志怪 소설의 작가들인 장화張華나 간보干寶, 유의경劉義慶은 물론이고 당대 단편소설로 문언文言으로 쓰여진 전기傳奇의 작가들 역시 일반 백성들일 수 없었다. 권력이자 권위인 문언을 어찌 일반인들이 쓸 수 있겠는가?

중국 전지(剪紙)

이외에도 아문화의 주체들이 속문화를 겸하게 된 데에는 나름 이유가 있다. 당대唐代 안사安史의 난(안록산과 사사명의 난) 이후로 중국 사회가 크게 동요하면서 사회계급에도 변화가 생겼다. 사士와 민民의 차별도 예전처럼 엄격하고 분명하지 않았다. 사인이 몰락하면 평민이 되고, 평민에서 사인이 되는 경우도 점차 많아졌다. 왕후장상이 별도의 씨앗이 있는 것이 아니니, 천민에서 제왕이 되는 이들도 나타났다. 예를 들어 한나라 고조 유방은 농민 출신이고, 수隋 문제나 당 고조는 한족화한 선비족이다. 북송의 개국황제인 조광윤은 군인 출신이니 엘리트 사대부 계층이라고 말할 수 없다. 또한 명의 개국군주인 주원장은 빈농 출신에 탁발승을 한 적도 있었다. 게다가 원나라나 청나라는 물론이고 남북조 시대 북조의 지배자들은 중원의 한족이 오랑캐라고 여겼던 이민족이었다. 이러니 아속이 전도되어 무엇이 고상한 것이고 무엇이 비속한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정판교(鄭板橋)의 매란국죽(梅蘭菊竹)

또 하나 주목할 점은 불경의 구전화口傳化이다. 불경은 당연히 문자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원래 팔리어였던 불경이 한역漢譯되었다고 할지라도 일반 대중들에겐 범접하기 어려운 문언이었을 뿐이다. 대중들의 불교에 대한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구전에 의한 포교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송대 잡다한 이야깃거리로 대중의 오락심리를 만족시켜주던 설화인說話人의 중요 주제 가운데 하나가 불경이었음은 이를 반증한다. '대당삼장취경시화大唐三藏取經詩話'가 당시 설화인의 대본집인 화본話本인데, 이것이 바로 장편소설 '서유기西遊記'의 조번祖本이다. 물론 이는 송대 이후 급격히 발전하기 시작한 시민들의 문화적 욕구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삼장법사의 취경(取經) 여정을 그린 돈황 벽화

이렇듯 아와 속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섞였다. 일반적으로 중국의 아문화雅文化라고 하면 시문, 다법茶法, 서화書畵, 바둑과 금琴, 골동품, 한거閑居, 방대한 전적典籍, 공맹이나 노장의 사상, 화려하고 웅장한 건축물 등을 떠올릴 것이다. 우리가 중국문화에 매료되는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하지만 중국이라고 하면 시끌벅적한 묘회廟會, 함께 모여 부르는 노래와 춤, 끊임없이 터지는 폭죽, 용무龍舞와 용선龍船 경기, 인구의 대이동이 이루어지는 춘절春節, 황토고원의 요동窯洞(동굴집), 전지剪紙, 온갖 신을 모시는 도교사원 등이 떠오르기도 한다. 현재 중국문화의 주류는 오히려 토속적인 것이 아닌가싶기도 하다.

이미 많은 연구자들이 중국문화의 이중성에 대해 논구한 바 있다. 동전의 앞뒷면처럼, 세상만물은 음과 양, 자연과 인위人爲로 구분되고, 여기에 호오, 시비, 미추美醜 등 가치판단까지 가해지면 이중적 시각이나 현상이 존재하게 된다. 중국문화도 마찬가지이다. 지나치게 아문화를 추구하다보면 기벽奇癖해지고 화려함만 추구하여 오히려 속물이 되고 만다. 속문화가 지나치면 저속해지고 부화하여 오히려 양속을 해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아속공상은 속문화가 아문화를 수용하고, 아문화가 속문화를 견제하여 전체 문화의 건전한 발전을 도모한다. 문제는 과연 지금의 중국문화가 아속공상의 진정한 함의를 보여주고 있는가라고 할 수 있는데, 과연 그러한지 좀 더 고민을 해봐야겠다.

<심규호·제주국제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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